방황의 가치11_2012년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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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아버지께서 사주셨던 오디오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작은 카세트 플레이어를 망가뜨린 보상으로 사주신 것읻데, 그것이 내 생애 첫 오디오다. 긴 생머리에 길쭉하고 날씬한 몸매를 뽐냈던 전지현이 테크노를 추는 광고로 화제가 되었던 S사의 제품이었다. 아버지는 가격이 다른 두 가지 종류 중 저렴한 동그란 모양 아닌 비싼 가로로 긴 모양의 것을 선택하셨다. 아마도 카세트를 망가뜨린 일이 꽤 미안하셨던 모양이다.
얼마 전, 그 오디오가 완전히 고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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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는 워크맨을 꽂아서 카세트 테잎을 들을 수도 있고, CD도 들을 수 있으며, 심지어 라디오 기능도 있었다. 그것이 집에 온 날 가장 처음 한 일은 아마도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는 일 이었을 것이다. ‘이적의 FM플러스’를 듣던 시절인지, ‘김진표의 라디오 천국’을 듣던 시절인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 테크노댄스로 광고를 하던 그 오디오로 나는 잔잔한 음악이 주로 나오는 심야 라디오를 들었다. 그 중 최고였던 라디오 프로그램은 ‘이소라의 음악도시’. 그 시절 내겐 위로와 같은 방송이었다. 지금도 어디서든 이소라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질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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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산 첫 CD앨범도 이 오디오로 들었다. 서태지의 6집. 핌프록이라는 생소한 장르였다. 당시 난 그 음악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이 났다. 그래서 엄청나게 들었다. 하도 들어서 가사가 쓰인 자켓을 잃어버렸을 정도였다. 요란한 밴드의 반주에 서태지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아서 가사 보면서 공부하듯 음악을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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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때 임형주라는 팝페라 가수가 첫 앨범을 냈다. 타이틀곡은 ‘샐리가든’. 유명한 외국 민요곡이라는 것을 지금은 알지만 그때의 내겐 아주 생소한 곡이었다. 처음 듣는 순간 그 곡에 반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앨범을 샀다.
그해 여름 예술대학 미대 입시를 위한 실기 시험을 몇 주 앞두고 몸살이 났다. 포트폴리오 준비니 뭐니 해서 바쁜 상황이었는데, 꼼짝 없이 침대에 누워 끙끙 앓았다. 그때 오디오로 들었던 앨범이 임형주 1집. 그 중 아베마리아라는 곡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줬던 것 같다. 무슨 의미를 가진 말인지, 어떤 배경이 있는 곡인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나는 크리스찬도 아니다. Ave Maria. 찾아보니 그저 ‘안녕하십니까, 마리아!’라는 뜻이라고 한다. 결국 목소리와 음악의 힘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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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자리를 지켰던 이 오디오가 얼마 전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라디오 안테나가 본체와 분리되기도 했고, CD를 넣는 입구가 잘 열리지 않아 손으로 밀어 올려 힘을 보태야만 음악을 들어 수 있었다. 그러다 완전히 고장났다. 완전히 수명을 다한 오디오를 결국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늘 오디오가 있던, 이제는 텅빈 그 자리가 유난히 허전하다. 마치 사람을 떠나보낸 것처럼.
긴 시간 오디오는 내게 친구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