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가치14_2017년 10월 22일
답답한 사무실 한 켠에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책이 꽂혀있었다. 정말 평범한 문장을 제목으로 한 책이었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 -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 어떤 내용인지 책을 뽑아서 펴보려했으나, 그럴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바빴다.
사실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지킬까. 선택을 해야할 시간이었다. 그곳에 좀 더 남아 초라한 내 통장 잔고를 채울 것인가, 그곳에 간 이후로 한 자도 쓰지 못한 글쓰기를 다시 시작할 것인가. 고민이 시작되었던 즈음 하필 내 눈에 그 책의 제목이 들어온 것은 우연일까 운명일까. 그렇게 나는 그 직장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래 남았던 직장도 있었다. 내 인생의 고비를 넘기기 위해, 목표를 향해 가기 위해 견디고 또 견뎠다. 이 직장은 내게 그런 목표가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으나 그저 돈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나는 본디 미련이 많은 사람이다. 정말 견디다 못해 그만뒀다 하더라도 조금 더 버텨볼 수 없었을까 고민하고 후회하고 한참을 어두운 구덩이 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사람. 그러므로 늘 ‘좀 더’ 해보는 버릇이 있다.
‘좀 더’가 나를 키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자타공인 장점이라면 버티는 것인 나는 월요일에 출근해서 금요일에 퇴근하고 밤마다 작가의 비위를 맞춰가며 야식을 먹어야 했던 TV드라마 보조작가 생활을 1년 이상 버텼고, 월 70에 두 달에 한 번씩 시험 기간을 빙자하여 월화수목금금금의 생활을 하던 첫 직장도 1년 반을 버텼다. 부당함을 따져 묻고 먹히지 않으면 그만두라는 주변의 권고가 수없이 있었다.
그러지 못한 이유는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부족한 내가 상대의 부족함을 따져 묻는 것이 옳을까, 그런 생각. 지금 생각해보면 부족함과 부당함은 다른 것인데 그 차이를 잘 몰랐던 것 같다. 어쨌거나 나는 그런 시간들을 토대로 자랐다. 좀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어디서나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좀 더’에 대한 나름의 프라이드도 있었다. 그래서 퇴사를 고민하는 지인에게 ‘좀 더’ 해보라는 충고를 한 적도 있다.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까? 여전히 나는 미련이 많은 사람이다. 후회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지만, 후회하지 않는 것은 내게 여전히 힘들다. 운명처럼 결단을 내렸다. 속행했고 물릴 수 없다. 물리고 싶지 않다. 이번엔 후회하지 않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