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가치 32_ 2020년 6월 3일
요즘 일주일에 이틀은 학원에서 독서 논술 강사로 일하고 있다. 얼마 전 학원 수업 때의 일이다.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과 <멋져부러 세발 자전거>라는 아동 소설로 수업을 하고 있었다.주인공과 삼촌이 1등도 꼴등도 없는 자전거 대회에 나가게 된다는 것이 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그 소설을 읽고 아이들이 해결해야 할 교재 속 질문 중에 이러한 질문이 있었다.
"이 자전거 대회와 같이 1등도 꼴등도 없는 대회는 어떤 것이 있을까?"
자료조사를 하지 않는 한, 아이들의 생각이 빛나야 하는 질문. 다들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평소 똑부러지는 여자아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대답한다.
“연기대회요!”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연기라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인데, 그것은 모두가 다른 것이지 누가 더 나은 것이 아니잖아요."
그렇지. 좋은 생각이다. 대답했지만 속으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쩌면 아이의 생각이 일평생 비틀려 있던 나의 삶을 때리면서 어떤 균열을 만들었다. 연기가 그러하듯,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일 또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일. 아이의 논리대로라면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것을 붙들고 17살 이후로 나는 내내 다른 누구보다 더 잘하길 바라면서 열심히 살아온 것이다.
인정받지 않으면 프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인정받으려 애써왔다. 그러는 동안 즐거움이라는 것이 점점 변했다. 처음엔 "그저 즐거웠다"면 이젠 "고통스럽지만 즐겁다". 고통과 즐거움을 동시에 즐기는 변태적 성향을 받아들였으므로 역시나 즐겁지만, 과거의 순수했던 즐거움과는 영원이 멀어졌다.
요즘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완벽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일주일에 이틀을 가는 아르바이트이지만, 2주간에 걸쳐 초등학생용 도서 다섯 권. 중학생용 도서 세 권을 읽은 후 책과 관련한 수업을 하는 것이라 독서 시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여유있게 독서를 할 순 없다. 내가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중학생 수업만을 맡아서 하다가 초등학생까지 맡게 된 근 3개월 동안은 새로운 책의 수업이 시작되는 바로 전날, 하루만에 초등용 도서 다섯 권 또는 중학생 도서 세 권을 내리 읽고 답도 적혀 있지 않은 문항들에 답을 모두 베껴 적는다.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묻는 문항들이기 때문에 책 내용을 정확히 써야만 하는데, 급히 읽어내려가면서 답을 내가 찾다 보니, 혹시나 오류가 있지나 않을까 늘 전전긍긍이다. 아직은 별다른 문제없이 지내오고 있지만, 언젠가 이 문제들이 곪아서 터지진 않을까 걱정이다.
어쩌면 단순한 불안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떤 일이든 탈 없이 해내려는 나의 심리 때문일 것이다. 일상을 둘로 쪼개어서 살아가고 있는 요즘 양쪽을 모두 완벽히 해내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욕심인지도 모른다.
보조작가를 그만둔 후 약 2년 동안 나는 언제나 돈벌이와 습작을 병행해왔다. 정확히 병행했다기 보다는 그 틈에서 갈등해왔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일 것이다. 돈을 충분히 벌면 습작을 거의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습작을 충분히 하면 돈을 벌 수 없는 상태가 된다. 그 양극단에서 나는 언제나 이쪽 아니면 저쪽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처음으로 양쪽을 함께 쥐고 걸어온 지 딱 6개월이다.
늘 최선을 다했지만, 완벽할 수가 없다. 놓치는 것이 없지 않다.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완벽할 수 없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로인해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책임을 내가 질 수 밖에 없다.
어쨌거나 나는 글을 쓰는 일에 인생을 걸어버렸고, 그것을 아직은 놓을 수 없으니까. 서른여덟 살, 그때까지 눈에 보이는 객관적 성과가 없다면 나는 글쓰기를 접을 생각이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버텨보자 솔직히... 그런 마음이기도 하다.
얼마 전 부산 부모님 댁에 갔다. 내가 가면 늘 하는 연례 행사 중 하나가 들어놓은 보험의 해지 환급 금액 같은 것을 조회하고 물어보고 하는 일이다. 이번에도 그것을 알아보려 외출한 김에 보험사 상담창구에 들렀는데, 조금 특별한 일이 있었다. 엄마가 상담직원에게 보험 지급액을 한 번에 받는 대신 연금으로 전환할 수 있냐는 질문을 한 것이다.
은퇴 후 가게 운영을 그만두고, 집에서 지내는 동안 수입이 없이 통장에 모아둔 돈만으로 생활하는 것이 불안하기 때문에 연금이 필요한 것인데, 안정을 위해 필요한 연금의 액수를 듣고 생각이 많아졌다. 서른 여섯의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드릴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을 말씀이었다. 그러나 일주일에 두 번 일하며 내 생활비만을 벌고 있는 나로썬 드릴 수 없는 금액이었다.
평범하지 못한 딸 때문에 평생 성실하게 살아오셨고, 많은 것을 이루어내신 나의 부모님이 연금 걱정이나 하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나잇값, 자식 노릇, 이런 것들을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이렇게나 불편한 일일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른 여덟이라는 숫자는 내가 정한 것은 아니다. 현재 영화 시나리오 작가님과 함께 일하고 있는 작업실의 임시 기한이랄까. 작업실에 모인 이들 중 누구든 한 명이라도 어떤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팀을 해체하는 것이 전제된 모임이다. 생각해보니 3년 후면 서른 여덟. 그만두기 참 좋은 나이다 싶었다.
40대는 아니지만 곧 40대를 바라보는 나이, 그나마 마지막으로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전에 눈에 보이는 성과를 이루어 낸다면 더 앞으로 나아가기 좋은 나이다. 그러고 보면 이 바닥에 더욱 깊게 발을 담그고자 상경해 보조작가를 시작했던 나이가 딱 스물 여덟이었다. 딱 10년이니, 여러모로 딱 좋은 나이이다.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직업인으로서 작가가 된다면, 작가의 삶을 감내 할 것이다.지금보다 더 가난하고, 어쩌면 부모님에게 연금 같은 것은 드리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십수년간 닦아 놓은 땅에 비로소 씨를 뿌릴 수 있게 되었으니, 열심히 농사를 지어야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45세가 되기 전 어느 쪽이건 전문가가 되어야겠다는 것이 목표다. 지금 학원 일도, 사실 그간의 경험으로 어찌저찌 상담하고 수업하고는 있지만 전문가라기엔 부족하다. 상담 시 학부모들이 하는 질문들에 답할 때 가끔은 쉽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거기까진 모르겠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이 직업의 맹점이다.
생각해보면 글쓰기 교육이나 독서 교육과 관련된 책 한 권 읽은 기억이 없다. 그저 다른 교사들이 하는 말을 베껴서 하거나, 알량한 경험을 바탕으로 말하거나 하는 정도이다. 직업 작가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접는다면 우선 그 부분부터 확실히 채워 내야 한다.
그 외엔, 가벼워지고자 한다. 그림도 글쓰기도 모두 가볍게. 먼 미래보다 하루 하루가 즐거운 삶을 살아가야겠다. 물론 지금도 하루하루 보람차고 즐겁지만, 분명 미래를 위해 희생되는 현재가 있는 것이니까.
조금 정리가 된다. 인생 후반기를 어떻게 살아야할지. 꿈을 이뤄 작가가 되거나,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 평범하면서도 단단한 사람이 되거나.
비록 완벽하진 못해도 나쁘지 않은 삶을 위해 또다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