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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랜 Oct 19. 2021

경청하는 사람

방황의 가치 44_2021년 10월 18일

나의 연애가 망하는 이유는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대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자랑 대화하려고 하면 늘 싸우더라. 여자들끼리 수다 떨다 연애 이야기가 나왔을 때 가볍게 던진 내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동의의 끄덕임이다.      


남성과 여성은 출신이 다른 행성인가 싶을 정도로 다른 존재다. 그래서 대화를 하려고 하면 으레 싸우게 되는데, 문제는 나는 대화가 안 되는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때론 연애가 피곤하고, 결혼은 내게 난제다.     




얼마 전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 오는 친한 언니를 밀어냈다. 언니랑 이야기하면 벽하고 대화하는 것 같아요. 내가 대놓고 말하자, 상대가 이렇게 말했다. 

“진작 말해주지 그랬어.”

하! 설마 내가 말하지 않았을까! 한숨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대놓고 말하면 관계가 끊어질 게 뻔하니 돌려서 조심히 말했다. 아니, 사실 대놓고 말한 적도 있다. 그래서 며칠쯤 전화를 안 하는 듯도 하더니, 이내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그런데도 말해주지 그랬냐니. 늘 그랬지만 그때도 다시 느겼다. 내 말을 정말로 허투루 듣고 있었구나!     


처음부터 그녀와 이런 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친해지자고 자주 전화를 걸어오는 상대였고, 여러 가지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는 나날이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가감 없이 털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 거다. 전에 한말을 싹 있고 다시 리셋. 또다시 리셋. 처음엔 황당했지만 나도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 그의 성격을 이용해서 내 위주의 이야기를 털어 놓은 적도 있다. 


그러다 점점 더 자주 통화를 하게 되었다. 취업에 계속해서 미끌어져 힘듦을 하소연하는 전화를 올해 초 거의 매일 걸어왔다. 뭐가 잘 안된다 그랬다가, 이제 알 것 같다고 했다가, 다시 다른 문제가 생기고. 그 과정을 다 들어주며 조언 아닌 조언을 한 적도 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거의 매일 전화해서 내일이면 그녀에게 의미없어질 감정을 내가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 그리고 더욱 노골적으로 경청하지 않게 된 것이다.

  

때론 기억을 자기멋대로 왜곡하기도 한다. 심지어 나에 관한 객관적 정보, 예를 들어 사는 집의 위치 조차도 자기 멋대로 왜곡하는데 그것 또한 경청하지 않는다는 맥락 안에 있다. 타인이 준 나에 관한 틀린 정보를 정정해 주었음에도 타인에게 들은 것만 기억했기 때문에 생긴 착오니까. 사소한 일이지만, 경청하지 못해서 생기는 다른 문제들과 겹쳐지면서 거슬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경청하지 못하는 상대와는 대화가 되지 않기 때문에 전화 좀 작작하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 조차도 그녀는 내 말을 경청하지 않은 듯하다. 내가 바쁜 일이 끝나면 연락을 하겠다고, 그리고 벽 앞에 털어 놓아도 속시원하니 연락하라고... '그래, 내가 졌다. 졌어!'




사실 경청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안다. 주변에 점점 자기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만 남게 되는 것을 보면 특히 그렇다. 묵묵히 들어주는 사람이 드물다. 그래서 타인에게 딥한 속내를 털어 놓지 못한지 오래 되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속내를 털어 놓았는데 문맥을 잘못 이해해서 이상한 대답을 듣거나, 상대의 가치관에서 왜곡되어 되돌아 오는 경우도 많다. 경청이란 화자의 마음에 가닿는 것인데, 팔짱끼고 앉아서 자기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이야기를 쓰는 일에 대해 말할 때 돌아오는 대답을 듣고 있으면 “니까짓 게 어떻든 성공할수 있겠어?”라는 속내가 은근히 보일 때도 있는데...


아, 이건 오랜 실패에 느끼는 나만의 패배감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경청해주는 사람이 없는 인간관계에 깊은 불만을 느끼는 것을 보니 나 또한 어느새 내가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나?  얼마 전  동종업계 사람들과 처음 만나 티타임 겸 수다 모임을 가진 적이 있다. 인간관계의 일부를 정리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관계를 찾아 나선 것이다. 다섯시간쯤 수다를 떨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목이 아팠다. 노래방에서 한시간쯤 친구들과 신나게 노래 부른 것처럼. 


...     


나부터 경청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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