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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랜 Nov 04. 2021

인생의 새로운 챕터

방황의 가치45 _2021년 11월 4일


며칠 전 ‘하얀방’에서 짐을 싸서 나왔다.     


하얀방이라고 하면 섬뜩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속칭 하얀방이라고 불리던 독재 정권 시절의 대공분실을 떠올리기도 할 테니까. 그러나 나에게 하얀방은 5월부터 10월까지, 약 6개월간 사용하였던 내 작업실이다. 첫 당선에 주최 측으로부터 지원받았던 창문 없는 하얀 방. 그곳에서 나는 매달 일정한 지원금을 받으며 내 작품을 썼다.


처음엔 그곳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지독한 페인트 냄새가 나는 답답한 하얀방. 여기서 글을 제대로 쓸 수나 있을까 싶었다. 그러다 정을 붙였고 결국 나오기 아쉬운 곳이 되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불만이 떠오를 때마다 속으로 ‘나중에 이곳을 그리워할지도 모르니 너무 툴툴거리지 말자’ 다짐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 37년간 나를 알아가다 보니 나라는 인간의 패턴이 익숙해졌다. 미련 많은 사람. 어쩌면 그 하얀방에도 미련이 남았을까.          



2021년이 딱 두 달 남았다.     


아니, 두 달도 채 남지 않았다. 남은 두 달 동안 내게 두 번의 기회가 있다. 비즈니스 미팅이라는 이름의 공모전에 당선되면 주최 측에서 당선 작가와 제작사가 만날 수 있도록 마련하는 자리다. 작품과 나의 정보를 보고 제작사가 나를 만나고자 신청해야 올 수 있는 자리다. 그러니 선택받지 못하면 참석조차 안 할 자리이지만, 어쩌면 그날이 내게 터닝포인트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얀방’에서 함께 했던 작가들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경험상 비즈니스 미팅이라는 것 자체가 ‘그저 행사’라는 의견이다. 그 자리에서 계약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것. 그날 이후 어떤 챕터가 열릴지 기대가 반이지만, 실망하지 않으려 마음에 담을 쌓는다.          



그리고 어제 저녁 전화가 걸려왔다.     


‘하얀방’에서 함께했던 작가 중에 한 분이다. 사실은 영화감독으로 아주 오랫동안 독립영화를 찍어오셨고, 영화인으로서의 삶이 담긴 에세이를 출간하신 분이다. (이건 네이버 검색을 통해서 알았다.)

 

 -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작가님. 궁금한게 있는데요...


며칠 전 하얀방 작가들끼리 술 한잔을 하고 돌아오며 내가 번호를 따긴 했지만, “전화할 일이 있을까 싶지만 일단 따요.”라고 했을 뿐인 그런 사이. 대뜸 전화를 건 그는 내게 어떤 거 쓰냐, 당선된 작품은 뭐냐 등등을 묻는다. 무슨 이유에선지 나는 홀린 듯 성실히 대답한다. 


그가 내게 날을 잡고 대본 바꿔 읽어 보는 어떠냐 제안한다. 나는 피드백이 오간다면 괜찮다고 말한다. 말 중간에 그가 지나듯 공동작업에 관한 이야기도 꺼냈던 것 같다. (이건 굉장히 신중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작가 생명이 400여일 밖에 남지 않았던데.”


사실 나는 내년까지 눈에 띄는 성과, 즉 계속 이 일을 해야만 하는 객관적 명분이 없다면 극본 쓰는 일을 그만둘 생각이다. 술자리에서 했던 나의 그 말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카카오톡 프로필에 설정해둔 디데이가 무슨 의미인지 눈치챈 걸 보면.


문득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400여일 그 이후, 정말로 내가 극본쓰기를 그만둔다면 그야말로 인생의 새로운 챕터다. 국립 발레단 수석 무용수였다가 해외 무용단에까지 스카웃되었던 발레리나 윤혜진은 남편을 만나 딸을 낳고 살고 있는 현재를 과거와 다른 새로운 챕터라고 말한다. 그녀의 말에 확신이 느껴졌다. 그러나 내게 인생의 새로운 챕터란, 미래의 불확실에 대한 흔한 감정보다 더욱 막막한 어떤 것이다. 

     

안정된 삶을 위해 나아가는 새로운 챕터이나 어느 때보다 불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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