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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랜 Dec 15. 2021

결혼은 이변이다

방황의 가치48_2021.12.14 


그가 한 이야기를 기억나는 대로 정리해보자면 이러하다.      


조물주는 인간을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었고,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러니 결혼해야 한다. 

아이를 낳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낳아 기르게 만들어진 인간이 출산을 거부하거나 막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니 출산도 해야 한다. 

결혼이란 타인과 타인이 만나 맞추어나가며 무언갈 도모하는 성장의 과정이고, 부모가 되는 것 또한 그러하다. 태어났으니 마땅히 이루어내야할 성장이다. 그러니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 성장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     


꽤 긴 이야기였다. 끝까지 들어준 이유는 딱 하나다. 누군가와 결혼하고 싶은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고 해서, 그게 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덧붙이자면 요즘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구상 중이라서 궁금했던 뿐이다)     


사실 살면서 단한번도 누군가와 결혼하고 싶었던 적이 없다. 이 사실이 의아한가? 나는 이 사실을 의아해하는 당신의 시선이 더 의아하다. 나로선 타인을 깊이 신뢰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므로.


그래서 궁금해졌다. 그가 결혼하고 싶었던 사람이 여럿 있었다길래. 그게 어떤 감정인지. 그는 자신이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이야기이든 할 수 있고, 모든 면에서 자신과 잘 맞았던 사람이라고. 그런 존재가 있었다니 거짓말 같았다.     


“진짜 어떤 이야기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고요?”     


나는 끝내 이렇게 되묻고 말았다.

          



타인과 만나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내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나의 24시간을 공유할 배우자를 만들고, 그 배우자 뿐 아니라 가족까지도 한 데 보듬어야 할 일이니까. 그럴 수 있는 사람의 실체를 본 적 없다. 내가 결혼하지 않는 솔직한 이유는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이다. 없는 사람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나이나 조건만을 따져 누군가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다. 앞으로의 삶 어쩌면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을 그런 기준으로 고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결혼을 ‘인생의 이변’으로 규정한 데에 더 큰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결혼이 적성에 맞지 않는 사람이다. 길고 긴밀한 인간 관계에 취약하다. 가족조차도 10년 가까이 떨어져 지내고 있고, 친구들은 1년에 한두 번 만날까 말까 한다.      


자주 오래 만나다 보면 으레 타인 쪽에서 먼저 성격이나 욕망을 드러냈다, 나는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연락을 끊어버렸다. 어쩌면 내가 한 기대 때문일지도 모른다. 상대의 욕망과 성격이 내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으니, 실망해 절연했을지도.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별다른 기대하지 않을 수 있는 관계만을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가족은 기대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니 타인과 가족이 되는 결혼이라는 제도는 내게 맞지 않다. 그래, 인정한다. 내 성격이 좀 이상하고 고약하다는 거.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내가 이런 사람인걸.     


아이를 낳는 문제도 비슷한 맥락 안에서 꺼려진다. 나의 24시간을 공유하고, 심지어 나로 인해 자신의 인격과 성격을 형성해 나갈 존재를 만들어서 수십년을 키운다는 것이. 그 존재의 예측불가능함이 두렵다. 무엇보다 일정 부분 나를 닮은 내 자식이 내가 겪어온 것과 유사한 고통과 문제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자신이 없다. 어쨌든 나의 의지로 낳은 아이이고, 그 아이가 나의 자식으로 태어나길 원한 적 없으므로. 이런 일방적 결정으로 아이가 고통스럽다면 그건 어쩌면 폭력인데, 다들 알겠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삶은 어떤 식으로건 고통이다.     




그는 이런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에 반드시 혼인신고라는 제도로 남녀를 묶어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순간 굳이? 라는 반발심이 들었다. 사실 그의 말 태반에 동의할 수 없었다. 인간을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고,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로 만든 의도가 결혼시키기 위함인지 조물주에게 물어보았는가? 혼자 사는 삶에 만족하고 있는 나는 그럼 돌연변이란 말인가? 애초에 전제가 잘못되었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있다. 사회적 동물이라곤 하지만, 사회 생활은 집 밖에 나가서 하는 것으로 족한 나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타인과 만나 가족을 이루는 것이 일종의 성장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1년 전의 나였다면 이 또한 동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 조카가 생겼고, 그로 인해 나 또한 어른이 될 수 밖에 없겠다라는 것을 받아들인 이후로. 그 아이를 위해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감정을 느낀 이후로 그 ‘성장’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납득이 된다.     


하지만 배우자와 자식이라는 여건이 만들어졌음에도 어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결혼의 무게를 느끼지 못한 채로 그저 남들이 하니까 한 사람들 중에 특히나 그렇다. 30대 후반까지 아이가 없는 지인으로부터 스스로 뭐가 모자라서 남들 다 가진 자식을 갖지 못했나라는 자책을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남들이 있으니까 나도 가져야 하는 것이 자식인가? 자식은 학교 가면 반드시 입어야 하는 교복이나 갖고 다녀야 하는 책가방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태반이 결혼과 출산을 그렇게 치부한다.     


역으로 묻고 싶기도 하다. 모두가 다 어른이 되어야만 하는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고 조물주가 말했나? 그렇다면 조물주에게 말하고 싶다. 나는 그다지 어른이 되고 싶지 않다고. 여전히 나는 나의 시간과 삶이 소중하고, 조물주의 의도보단 내 의도가 중요하다.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고, 어떤 존재로 남고 싶은지에 가장 골몰한다.      


조카로 인해 어른이 될 수 밖에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조카는 일 년에 열 번 만날까 말까하다. 그러니 그날만 어른인 척한 후 평소엔 그냥 나로 살면 안될까?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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