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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랜 Apr 04. 2022

사과할게요

20220403_방황의가치52

나는 학원에서 토요일마다 중학생들을 상대로 논술 강사를 하고 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꼬박 10시간이 넘는 수업을 한다.      


어느 날 퇴근 후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데 학부모로부터 전화가 왔다. 학부모는 ‘의논드릴 것이 있다’며 정중히 양해를 구한 뒤 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자신의 딸이 학원에서 같은 반인 아이들과 어떤 일을 겪었고, 수업시간에 일어난 일로 굉장히 상처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목격한 상황이었다. 수십명의 학생들을 하루에 만나는 강사로선 그냥 넘길 법한 평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학부모의 말에 따르면 그 행간에 내가 알지 못한 아이들의 관계가 숨어 있었다. 약간 의아했으나 그냥 넘긴 학부모의 딸의 반응에 단서가 있었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그 아이를 상처받게 한, 학부모가 가해자라고 칭하는 두 아이에 대한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도 포함되어 있었다. 관계에서의 문제를 떠나서 강사로서 그냥 넘길 수 없는 행동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목격한 평범한 상황이 어느새 그 아이들의 악의 가득한 뻔뻔한 행동으로 둔갑되었다.     


흥분한 학부모의 전화, 자신의 딸이 반드시 사과받았으면 한다는 요구사항은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5년여의 공백이 있긴 하나 어느새 8년 차가 된 강사 생활 중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함께 그 아이를 담당하는 다른 과목 선생님과 원장님과의 의논 끝에 결국 아이들을 모아서 대면시켜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로 했다. 

    

이 방법에 학부모는 불만을 표했다. 자신의 딸은 혼자이고 (그녀의 시선에) 가해자인 아이들은 둘인데, 그들이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면 사과도 뭣도 없이 흐지부지 끝나는 거 아니겠냐고. 어쨌거나 피해자는 자신의 딸이라고 강조하기까지했다.      


학부모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원 측에선 어느 쪽이 피해자이고 어느 쪽이 가해자라 단정 짓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게 말하지 않고 돌려 가며 어떤 식으로 해결하겠다고 설득할 만큼의 내공이 이제는 내게 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나고 수업하는 토요일날 아이들을 만났다. 그사이 나에게도 의심이 생겨났다. 시간이 지났으니 기억이 안 난다거나 그런 행동을 아예 하지 않았다고 발뺌을 하면 어떡하나. 그런 일이 없게 작전을 세워야겠다. ‘죄수의 딜레마’라는 방법이 떠올랐다. 각각 불러 이미 다른 아이에게 들어 사실을 다 알고 있는 듯이 추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실을 알아낸 후 그것이 왜 잘못되었는지 가르친 다음 사과해야 한다고 시킬 계획을 세웠다. 학부모가 가해자라고 칭한 아이들은 어느새 내게도 ‘죄수’가 되어 있었다.

     

일은 의외로 순조로웠다. 위기를 직감한 한 아이가 그런 일이 없었다 발뺌했으나, 다른 아이가 사실을 털어놓았다. 두 번째 아이의 경우 죄수의 딜레마 같은 방법은 필요치 않았다. 정말 순순히, 순수히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세 아이를 모았다. 이제 가르치고 사과를 시킬 차례였다. 그런데 나의 말이 계획가 다르게 흘러갔다.

 

 “...그래서 이 친구가 상처를 받은 거야, 얘들아. 그럼 이제 우리가 이 일을 어떻게 해결했으면 좋겠니?”


사과를 시키기 보다 방법을 물어버린 것이다. 그러자 순순히 모든 것을 말한 아이가 대답했다.


 “저희가 사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 아이가 말하자 자신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다고 한 아이도 사과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분위기는 자연스레 사과를 하는 쪽으로 흘렀다. 물론 당했다고 주장하는 아이는 끝까지 그들의 진심을, 특히나 발뺌한 아이의 진심을 의심하는 듯했다. 겪은 일 때문이겠으나 거기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 관계의 심연까지 강사인 내가 해결할 순 없는 노릇이니.          




‘사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그 말이 내 가슴을 툭하고 쳤다. 아이들을 대하다 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당연한 말을 순수하게 뱉는데 그것이 내 어딘가를 건드리는 순간이. 의도치 않은 말로 친구가 상처를 받았다고 들었다. 그러니 사과해야 한다. 내 의도가 어땠든 상처를 주었으니까. 선의가 있다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어디 어른들도 그런가? 그런 의도가 아니었으니, 잘못 알아들은 상대의 잘못이니, 자기는 사과할 이유가 없다며 방어하기 바쁜 이들이 대부분이다. 애초에 아이들이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면 흐지부지 끝나는 거 아니냐던 학부모가 보여주듯. 우리는 종종 그런 상황에 맞닥뜨린다.     


수업 중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아이들에게 해결법을 묻는 것은 사실 논술강사 초년일 때 쓰던 방법이었다. 국어 강사로 4년간 일한 후, 5년간 글쓰기와 시급 아르바이트, 드라마 보조작가 일로 생계를 이었다. 그러다 다시 학원 강사 일을 시작했다. 국어 대신 글쓰기를 활용할 수 있는 논술 강사를 택했다. 처음으로 취업한 논술 학원에서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을 맡았다. 그때 수업 중 문제가 생기면 아이들을 모아놓고 비슷한 방법으로 의논했다. 생각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법을 훈련하는 곳이 논술학원이니 우리들 수업 중에 문제의 해결 방법도 스스로 생각하고 의견을 내는 것 또한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수업 시간에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 주로 아이들이 떠들거나 협조적이지 않아서, 분위기가 흐려지고 다른 학생에게 방해가 되는 것들이었다. 문제의 원인 또한 아이들. 그러니 아이들에게 문제 해결 방법을 말하라고 하면 회피하거나 엉뚱한 답을 내놓지 않을까 우려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김없이 가장 기본적인 답을 내놓는다.     


“떠드는 친구들이 함께 앉지 못하게 해요.” 

“방해하는 아이들에게 어떤 벌을 주도록 해요.”      


강사인 나보다 더 단호한 해결을 내놓아 “정말 괜찮겠니?”라고 되물을 때도 있었다. 그것의 실질적으로 얼마나 효과적이었나를 떠나서 방법 자체는 아주 설득력이 있었다.      


그 후 중학생들을 수업하게 되면서 그 기억조차 까맣게 잊고 지냈다.          




삼자대면이 끝난 후 학부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사과하는 방법을 생각해내어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결국 원하는 대로 되었다고 보고했다. 학부모는 이번엔 본인이 가해자라고 칭한 아이들이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딸에게 복수할 수도 있지 않냐고 말한다. 그 아이들 입장에선 기분이 나쁘지 않겠냐면서. 


한번 씌워진 가해자의 프레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선뜻 사과하겠다고 나선 아이들의 선의는 그렇게 어른들의 편견에 의해 쉽게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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