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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랜 Feb 17. 2022

중독

방황의 가치 51_2022026

1.

2월 10일. 올해에 혼자 쓰고 잇는 12부작 미니시리즈를 ‘일단’ 마감하여 모 방송사 공모전에 내기로 한 날이다. 작년에 시작한 기획이지만 다른 작업 때문에 멈추었고, 제대로 시작한지는 두달 정도 되었다. 그래서 잘 알고 있다. 무리한 일정이었다는 것. 그래도 가능하다 생각했던 이유가 있다.      


우선 그 방송사 공모 요강에 쓰인 기획안 20장. 흔하게 구해서 읽을 수 있는 미니시리즈 기획안은 대체로 30장 이상 40장 내외다. 그러니 20장을 내라는 건 컨셉만 본다는 의미다. 이는 마지막까지 디테일한 내용이 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도 된다. 그러니 설정과 구성만으로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두 번째 이유는 역시나 방송사 공모 요강에 대본은 1-2부만 쓰면 된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주인공만 제대로 잡혀도 1-2부의 디테일한 사건 정도는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2월 7일 1부의 초고를 쓰는 중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부 규격이 A4용지 11포인트로 35장 분량인데, 2부의 이야기를 끌어다 쓰고서야 스무장을 겨운 넘겼다. 평소 씬리스트를 먼저 작성한 후 작업했는데, 그마저도 시간이 없어 생략하고 막바로 씬을 쓰기 시작한 후 반나절이 지난 즈음이었다. 좌절했다. 이건 단지 구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1부는 주인공을 극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목적인 회차이다. 그러니 주인공 연구조차 완전하지 않음이 문제인 것이다.     


10년 넘게 공모전에 도전했지만 내려던 공모전에 내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까지 만화가 지망생이던 시절 한 하나의 공모전도 제대로 낸 적이 없다는 점을 반성하며 무조건 내는 것이 내 작가 지망생 인생의 모토였다. 그래서 냈다, 무조건. 그렇다고 대충이라도 써서 내자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정말이지 죽어라고 써댔다.


          



2.

쓰는 동안은 최대한 몰입한다. 저절로 그렇게 된다. 그러다 보면 작품과 관련이 없는 것들을 보거나 읽는 것이 힘들어진다. 많은 것을 보고 읽으며 쓰지만, 더불어 놓치는 것들 또한 많다. 가장 기본적인 것들. 이를테면 글쓰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학문인 철학이나, 베이스로 갖고 있어야할 고전 문학 같은 것들을 뒤로 미루게 된다.     

집 근처에 철학 입문 수업이 열려 들으러 다니고 있다. 독학할 시간이 없으면 강의를 듣는 것이 경제적이다. 강사님은 프랑스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한국에서 이런 저런 강의를 하러 다시니는 분이시다. 강의는 철학적 지식 이외에도 때때로 내게 자극이 된다. 이를테면 고전 문학에 관해서도. (철학자가 고전 문학에도 통달해야하는 것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수많은 고전을 예로 들어 설명하는 내용을 듣고 있으면 부끄러워진다. 그만큼 많이 읽고 연구한 흔적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성실히 살았으나, 누구보다도 성실히 살지는 못했다는 것을 똑바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놓쳐버린 것들이 나를 제자리에 머물게 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글에 몰두한 시간이 오히려 작가가 되는데에 방해가 되었을까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내 안일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3.

글이 무너지니 생활도 무너진다. 한 주 동안 마신 술이 어마어마하다. 냉장고에 들어있는 족족 마셔댔다. 큰마음먹고 와인 한 병을 샀는데, 다음날 2/3가 비워져있는 걸 발견했다. 맥주 두 캔을 마신 후 취한 채로 낑낑대며 와인병 따서는 한 잔 마시고 필름이 끊겼다. 몇잔을 더 마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알콜 중독이 언제부터 내게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알콜 중독이라는 것을 인지하여 스스로 조절할 때도 있다. 술이 독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무너진 나를 잊기위해 술을 마신다. 술이 나를 더 무너뜨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치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신다고 하면서도, 술을 마시는 자신이 부끄럽다던 <어린왕자> 속 술꾼처럼.




4. 

좋아하는 화가 베르나르 뷔페를 내 드라마 속 극적 장치로 사용하려 이런 저런 검색을 하다가, 그가 삽화를 그린 프랑수와즈 사강의 에세이 <독약>을 읽게 되었다. 몰핀 중독에 빠진 프랑수와즈 사강이 중독 치료 기간 동안 쓴 일기이다. 짧은 글과 흑백의 그림이 잘 어우러진 가벼운 책이다. 간결하지 않은 번역투의 문장을 더듬더듬 읽어나갔다. 걸음걸음 프랑수와즈 사강의 내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가 중독치료를 받는 과정, 그것은 글쓰는 삶으로 회복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의 마지막 즈음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이 작은 해독 일기는 여기에서 끝난다. 중독 치료는 가벼웠고 일기는 유익했다. 나는 삶을 살아가고 글을 잘 쓸 것이다.”     


감히 예상컨데 프랑수와즈 사강은 글과 삶이 일치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 일체감이 무엇인지 잘 안다. 글이 삶을 너무도 간섭하는, 글과 삶을 뗴어 놓을 수 없는 그런 상태. 문득 그런 삶과 중독이 관련이 있는 것인가 생각했다.      


나는 긴 시간 글에 중독되어 살았고, 또한 술에 중독되어 살았으니까. 하지만 과연 그런가?          





5.

IMF시대를 배경으로한 드라마가 새로 나왔다. 코로나19의 시대의 대한 메타포로 IMF의 시대를 보여주고 있는 1부의 구성이 거슬렸다. 재작년에 써서 공모전에 응모하고 있는 내 단막극 드라마 중에 그런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히 시대를 어떻게 그려냈는지에 관해서 자세히 보게되었다. 긴 드라마에 주제와 장르, 주인공의 연령이 달라서이기도 하겠지만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그 시대를 것을 드러냈다. 나또한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며, 꽤 치열하게 연구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 만큼 치열했는지 확신할 수 없어 작업해놓은 파일을 열었다. 안일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파일을 닫을 수 있었다. 지금 또다시 그 드라마보다 내 드라마가 치열했는지 의심이 든다. 습관성 불안이다.   


나는 오랫동안 불안을 달고 살아왔다. 철학 수업 때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를 배우며 내 불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과거와 현재의 사이에는 결렬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과거와 현재의 사이에 무(無)가 존재하는 일종의 간극(?)이 생기는 것이다. 그로 인해 우리는 자유를 얻지만 동시에 불안을 얻는다. 이는 과거 뿐 아니라 미래와 현재 사이의 결렬을 통해서도 동일하다. 책의 표현 (혹은 책의 내용을 재번역한 나의 철학 선생님의 표현)에 따르면 "그렇지 않음의 방식으로 미래(혹은 과거)에 있음을 의식하는 의식이 곧 우리가 불안"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한다.

     

미래의 존재와 현재의 존재는 이미 관계해 있지만, 그 사이에 무가 스며들어 있어서 그것이 완전히 동일하지 않다. 다시 말해 나는 작가라는 미래의 나의 존재와 관계해 있지만, 지금의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이 작가라는 미래의 존재와 동일하지는 않다. 이 아이러니에서 불안이 나온다.


과거와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미숙한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있는 무로 인해 자유롭지만, 그것과 관계되어있는 나를 자각하는 순간 불안이 밀려온다. 미숙함으로부터 완전히 결렬되지 못했다는 자각에서 오는 불안이다.


결국 미래의 존재를 의식하면서 과거의 존재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모든 사람들은 약간의 불안을 갖고 살아간다는 의미일까? 어쨌거나 평생 동반자처럼 살아오던 나의 감정의 실체를 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서 새삼 새로이 규정할 수 있었다.


          




6.

나는 다시 시작하는 중이다. 그리고 4월 공모엔 적어도 1-2부 만큼은 완벽히 써서 낼 것이다. 과거 죽어라 써서 어떻게든 빠짐없이 공모전에 내는 작가지망생이었으나 여전히 데뷔하지 못했다. 그러니 오히려 내지 못하고 쓰러져 중독에 빠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작가지망생이 되었으니 더욱 더 좋은 글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과거와의 결렬을 통해 애써 자유로워져 보려한다. 

그리고 변화하고 있음에 안심해보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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