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철학 입문자

220525_철학입문자의 NOTE

by 오랜

사실 철학 공부를 해볼까하고 시도했던 때는 몇년 전이다. 2019년 말, 도서관에서 아람문예아카데미의 강의 홍보 책자를 우연히 보았다. '문예'아카데미라고 해서 나는 문학 수업을 하는 아카데미인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무슨 도서관에 문학만을 강의하는 아카데미가 있나 싶어 호기심에 그 책자를 가져왔었다. 그러나 막상 보니 문학과 예술을 아울러 이르는 말의 의미의 '문예'를 수업하는 강의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중 눈길을 끌었던 것이 철학강의 였다. ‘실존주의와 자유의 무게’라는 강의 타이틀. (사실 오랫동안 실존주의와 존재론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이 수업이 존재론으로 시작해서 실존주의로 귀결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팩트체크 해보니 기억하고 있는 강의 타이틀이 틀렸다. 아, 기억의 허술함이란!) 나는 숙제처럼 안고 있던 철학 공부의 무게를 덜기 위해서 수업을 신청했다.


월요일 오후 3시 수업이다. 나의 생활 패턴에 부담이 없는 시간이었다. 새벽에 잠들어서 10시에서 11시 사이에 보통 기상하니까. 그러나 월요일에 스케줄이 생긴다면 결코 들을 수 없는 수업이다. 하루 중 한복판에 있는 수업이기 떄문이다. 결국 3주 만에 딱 세 번 수업을 듣고 고정스케줄이 생기는 바람에 포기했다.


그 후로 종종 날아드는 홍보 문자나 도서관에서 볼 수 있는 책자를 통해서 같은 수업의 소식을 접했다. 자꾸 눈이 가는 이유는 끝까지하지 않은 것에 대해 미련이 많은 내 성격 탓일 것이다. 그러나 월요일 한낮에 수업을 듣는 것이 여러모로 내게 사치인 거 같다는 생각에 다시 수강할 생각을 못했다. 그러다 ‘철학 입문’이라는 강의의 타이틀을 보았다. 입문자가 될 기회인가? 생각했다. 끝마치지 못한 수업과 더불어 오랫동안 같고 있는 숙제를 다시 시작할 기회이기도 했다.


올해 처음 수강한 겨울의 수업은 여섯 개의 주제로 이루어진 6강짜리 개론 수업이었다. 강의실로 가면 강사님이 만들어 놓으신 페이퍼가 놓여 있고, 그것을 보면서 수업을 듣는 형식이다. 말하자면 편하고 쉽게 얻어가는 수업! 돌이켜보면 그 6강은 매우 편했던 것 같다. (여러모로)






수업을 들으면서 스스로 발견한 것이 몇가지가 있다. 나는 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나름 철학과 닿은 사유를 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글을 쓰면서 개인과 관계, 사회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에 어느 순간 나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되었다.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생각과 가치관, 사유에 대해 꽤 구조주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구조주의에 의하면 내가 무엇을 보느냐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것을 결정짓는 것은 바로 ‘구조’이다. 말하자면 구조주의는 구조가 인간의 의식과 인식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오래 전에 <열정이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를 읽은 후 내가 갖고 있는 생각, 내가 결정한 나의 삶,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내가 살았던 시대와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해찬 세대’라고 불리는 우리들은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프레임 속에서 사춘기를 보냈다. 나는 ‘이해찬 3세대’이다. 확실히 기억난다. 한가지만 잘하면 대학갈 수 있다는 학교 선생님들의 말 함께 꼭 따라붙는 가설을 실증하는 신화와 같은 사례들, 그리고 당시 유망 직종에 올라 있었던 문화계의 여러 직업들. <열정이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에 따르면 이 세대에 문화계 종사자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한때 나 또한 문화계 종사자였고 그 분야로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시대의 영향을 받은 셈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가 살았던 시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만들어졌다. 그 시대를 살았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사랑에 관한 내 입장은 파스칼의 입장과 매우 유사하다.

파스칼은 “우리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특성들을 사랑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특성이란 상대의 ‘어떤 면’을 의미한다. 내 연애는 왜 짧게 끝날까? 긴 시간 자문해 본 적이 있다. 나는 그것이 상대에게 호감을 갖는 동안 내가 집중하는 어떤 면(=파스칼의 특성)의 이외의 것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연애를 시작하면 그 이외의 면들까지 겪어야 하는데, 때론 그것이 못 견디게 어려웠다. 어쩌면 연애를 시작하기 전 내가 바라본 상대의 특성이라는 것이 실존하지 않는 상상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짧은 시간만에 실망해버리는 것이다. 물론 파스칼이 말하는 특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이렇게 본다면 확실히 글쓰는 일과 철학하는 일은 많이 닿아있는 것도 같다. 단지 글쓰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생각했던 것들이 철학적 이론과 이어지니 말이다.


더불어 오랫동안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내 불안의 이유 또한 철학 공부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사르트르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 사이에 무(無)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무가 문제다.


“나의 미래의 존재와 나의 현재의 존재 사이에는 이미 하나의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 관계의 중심에 하나의 무가 스며들어와 있다. 나는 내가 있을 자로 지금 있지 않다. 그것은 첫째로 시간이 현재의 나를 미래의 나에게 떼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내가 현재에 있는 것은 내가 장차 있을 것의 근거가 아니기 때문이다. 끝으로 현재의 어떤 존재자도 내가 장차 있을 것을 엄밀하게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사르트르, <존재와 무>, 정소성역, 동서문화사, 2009)


이런 상태 때문에 우리는 “그렇지 않음이라는 방식으로 자신이 미래에 있음을 의식”한다. 그것이 우리가 느끼는 불안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10대 중반 이후로 나는 늘 불안했다. ‘미래에 있음’ 다시 말해 ‘미래의 존재’를 의식해 왔기 때문에. 더 쉽게 말하면 목표가 있는 삶을 늘 살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의 ‘근거’가 아니므로. 결국 늘 갖고 있던 나의 목표, 꿈이 나를 늘 불안하게 만들어 왔다는 사실을 사르트르를 배우면서 깨달았다.





사실 나는 철학 속에 ‘답이 있다’는 ( <끝에 시작하다> 에 언급한) 교수님의 말씀을 ‘정답이 있다’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철학 입문 첫 시간 강사님께서 ‘철학은 정답을 말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다. 교수님의 말씀과 완전히 반대되는 강사님의 말씀에 사실 당황했다. 그런데 배우는 과정에 정답이 아니라 그냥 ‘답’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기서 ‘답’이란 한 시대, 한 개인의 규정이라고 생각한다. 언제든 반박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어떤 시대 어떤 개인에겐 유효한 규정들. 문학이 메타포라는 포장 안에 숨겨두는 답을, 철학의 규정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이셨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는 두 번째 강의를 들으면서 더욱 선명해졌다.






2022년 1월 3일~2월 14일

[철학과 보이지 않는 것들 - 철학입문] 강의 후기

(고양아람누리 문예아카데미 / 강사 : 장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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