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책 속에서 발견한 것들

220525_철학 입문자의 NOTE

by 오랜


[철학과 보이지 않는 것들 -철학 입문] 수업의 마지막 날, 수강생의 요청으로 다음 수업에 대한 예고가 있었다. 강사님께서는 입문 수업을 이어가겠다며 ‘강독’ 수업을 하겠다고 하셨다. 매주 책을 읽고 하는 수업이라는 것이다. 수업 교재는 이정우의 <개념-뿌리들>이라는 책이다.


겨울 특강이라는 이름의 첫 수업과 달리 두 번째 수업은 본 학기 강의, 12강짜리였다. 나는 12강을 빠지지 않고 들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재수강 의사가 없었다. 낯선 철학이니 한 번이라도 빠지면 그 이후를 영영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돈 낭비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돈과 시간을 낭비할 여유같은 것은 없었다. 그런데 입문 수업이라고 한다. 6강 수업처럼 수업별로 다른 주제라면 앞 수업을 빠져도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용기 내 수업을 이어서 듣기 시작했다.


수강을 결정한 다른 이유도 있다. 6강의 마지막 수업 전날 그간 받았던 강의 페이퍼를 모두 읽어 보았다. 고작 6주 전에 배운 내용임에도 이미 조금 낯선 것이 되었다. 자주 쓰지 않는 지식은 빠르게 휘발된다. 삼십대 중반이 된 이후 늘 그것이 불만이다. 아무리 공부해도 계속 휘발된다면 공부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말이다! 조금이라도 더 배운 것들을 잡아두고 싶었다.




이정우의 <개념-뿌리들>은 원리․원인, 자연, 운명, 존재 등... 일상적인 말이면서 철학의 개념인 것들의 뿌리부터 근대의 사유까지 서술된 책이다. 철학자 이정우가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의 강의안, 녹취록이기도 한 이 책이 사실 처음엔 조금 버거웠다. 일단 무게부터! 744페이지의 양장본이다. 수강을 확정하기 전에 책을 먼저 보기 위해 도서관에 갔을 때, 내용의 난이도 보다 그 무게가 더 부담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내용 또한 쉽지 않았다. 월요일인 그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서 일요일날 책을 읽어야 하는데, 그래도 일요일이라 쉬는 마음으로 읽고 싶어서 반신욕을 준비한 후 책을 들고 들어갔다. 그러나 다섯 페이지를 읽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촘촘한 사유를 느슨한 마음으로 읽어서 그런지 머리에 남는 내용이 전혀 없었다. 결국 반신욕을 끝내고 책상에 앉아서 노트북에 사전을 펴놓고 펜을 들고 읽기 시작했다.


평소 나는 책을 읽을 때 50페이지를 한 시간이면 읽어내곤 했다. 간단한 책은 더 짧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 책은 30페이지를 두 시간 동안 읽어야 했다 단 한 문장이라도 놓치면 전체가 이해가지 않았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책에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있다. 철학책을 밀도 높은 집중력으로 읽다 보면 차원이 다른 지적인 쾌감을 맞볼 수 있다고. (워딩은 완전히 다를 것 같다. 구절을 다시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처음 몇 주 간은 도대체 그 쾌감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고구마 백 개는 먹은 것 같은 답답한 관념적인 개념들을 읽어 내려가다보면, “도대체 이런 개념과 규정들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반감이 들었다. 어떤 날은 “당장 달려가서 수업료를 환불받은 후 이 책을 호수에 (아카데미 근처에 호수가 있다) 던져버리고 돌아올까?!!”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


그러다 책 속의 철학적 개념들이 시대와 맞아 들어가는 순간을 발견하면서 조금 재미있어 지기 시작했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을 배울 때이다. 그는 영혼과 육체를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는 다소 무리한 주장을 했다. 강사께서는 데카르트가 이런 주장을 한 이유가 당시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점이었고, 더불어 기계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어 ‘정신적 가치’의 결핍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아마도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육체 또한 기계로 본다면,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육체와 영혼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신 것 같다. 아주 흥미롭게 들었음에도 정작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아 아쉽다! 역시 쓰지 않는 지식은 빠르게 휘발된다!!) 데카르트는 시대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이원론을 주장했다는 것이다. 일종의 시대의 아젠다를 만드는 역할이었을까? 철학이 한 시대에 이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새롭게 다가왔다.


호수에 책을 던지지 않고 참고 읽은 덕에 철학적 텍스트에도 차츰 적응해 나갔다. 앞에 나왔던 개념들이 뒤로 이어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사전을 펴지 않아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더 공부해보고 싶은 철학적 개념도 있었고, 기억하고 싶은 빛나는 구절도 발견했다.


“그렇게 볼 적에는 ”무“는 없는 것이 아니고, 아직 무언가로서 구체적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잠재성으로 볼 수 있는 것이죠. 표현되기 이전의 ‘기’는 카오스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질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질서가 너무 많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서가 없다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사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생각이죠) 무수한 잠재적 질서가 섞여 있는 가운데에서 (일정한 상황/조건에 따라) 하나의 가닥이 현실화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사事 물物의 세계, 형, 색, 질의 세계는 카오스에 기반하고 있다고, 카오스는 이런 세계가 붕괴된 차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보다 더 풍부한 잠재성을 띤 차원이라고 할 수 있죠. (이정우, <개념-뿌리들>, 그린비, 2008) -p188”


수업에서 다루지 않은 부분이라서 온전히 나의 해석이지만, 여기서 무無는 ‘표현되기 이전의 기’이다. 그리고 무는 카오스, 즉 ‘더 풍부한 잠재성을 띤 차원’이다. 무로부터 유가 만들어진다면 여기서 말하는 무는 아마도 영감(靈感), 상상과 같이 구체적으로 만들어지기 이전의 상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직관적으로 떠올린 ‘무’는 이십대이다. 누구나 이십대까지는 ‘무’가 아닌가 싶다. 어떤 것으로 규정되지 않은 상태. 어쩌면 카오스라는 말이 더 와닿을 지도. 하지만 지나고 보면 누구나 알게 되지 않는가. 그때가 오히려 ‘풍부한 잠재성을 띤 차원’이었다는 것. 20대로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그 풍부한 잠재성만을 훔쳐 올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어느덧 12주의 수업도 끝이 났다. 총 18주간 진행된 철학 수업이 나에게 무엇을 남겼나? 현실적으로 이 수업에서 이야기의 모티브가 될만한 철학적 개념 한 개라도 취할 수 있으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민담을 원작으로 쓰고 있는 이야기에 풀리지 않는 부분을 풀어줄 모티브를 수업 중에 찾았다. 그러니 실리적으로도 꽤 만족이다.


사실 두 번째 <개념-뿌리들> 수업을 시작할 무렵에 기대하지 않은 목표를 강사님께서 제시하셨다. 철학책을 읽기의 독해력을 기르는 것. 정말로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업을 마치고 보니 적어도 <개념-뿌리들>을 읽는 독해력만큼은 좋아진 것 같다. 역시 호수에 책을 던지지 않고 참은 것은 잘한 일이다!

<개념-뿌리들>을 읽으면서 새삼스레 잊고 있던 나를 발견했다. 비록 반감과 분노로 가득한 시간을 견뎌야 했지만, 어떤 면에서 나는 이 책이 매우 흥미로웠다. 사실 나는 어떤 한 분야가 시대를 거쳐가며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공부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대학시절 동기들이 따분해했던 문학사 수업을 재미있어했던 그때 깨달았다. 습작을 시작할 무렵, 요령이 없어서 정직하고 무식하게 자료조사를 할 때 이야기 속 세계에 나오는 특정 분야의 역사를 공부한 적도 있다. 어쩌면 순전히 재미로 한 일. 그 재미를 오랜만에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했던 철학책의 지적 쾌감일까?


사실 12주 수업 동안에 이 책을 반정도 밖에 다루지 못했다. 그래서 뒤에 있는 내용 중에 궁금한 내용을 월요일 마다 조금씩 읽어 나가볼까 생각하고 있다.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게 될지는 미지수지만.


신기한 것이 이십대 중반 처음 혼자 공부할 때 그토록 재미없던 철학이 조금 흥미로워졌다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마지막 수업 후 뒤풀이 때 강사님께 이 말씀을 드릴걸 그랬다. 뭔가 <개념-뿌리들> 수업을 수강생들이 어려워하는 것에 스트레스 받고 계신 것 같아서. 그런데 사실 오글거려서 입으로는 도저히 안 나와서 말을 못했다)


이제 재수강이라는 선택이 남았다. 사실 정말로 철학책의 독해력이 좋아졌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리고 철학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내 삶의 곁에 두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그런데 글쓰는 위주의 생활에 ‘끝’을 생각하는 지금 월요일 오후 3시 철학 수업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옳을지 솔직히 조금 고민이 된다.

돈보다도 시간이 넉넉하지 못한 생태라.




2022년 3월 7일~5월 23일

[철학의 주요 개념들 - 철학입문] 강의 후기

(고양아람누리 문예아카데미 / 강사 : 장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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