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29_철학 입문자의 NOTE
조카 돌잔치에 참석 차 고향에 간 김에 부모님댁에 며칠 더 머무르는 바람에 이정우 선생님의 철학사 수업, 마지막 강의를 온라인으로 참여했다. 교재인 <세계철학사3>(저자 이정우, 도서출판 길)을 읽지도, 가져가지도 못한 상황이라 사실상 기억나는 수업 내용이 없다. 결국 종강 후 교재의 수업했던 부분을 다시 읽어야 했다. 프랑스 계몽주의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그 중 루소의 철학이 인상적이라 정리해보려한다.
맹자의 역설에 의하면 위대한 자연이 인간에게 준 두 가지 보물이 있다. 자기애(자기에 대한 사랑)와 자애심(타인에 대한 사랑)이다. 루소는 이 두 가지가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 점점 변한다고 말한다. 자기애는 이기심으로, 자애심은 경쟁심과 질투심으로. 그로 인해 삶이 점점 경쟁과 질시의 도가니로 변한다. 루소는 이를 개인이 아니라 문명 전체에서 확인한다. (<세계철학사3> 본문 내용 간접 인용)
이 책의 루소 부분을 읽으며 내가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대해서 언급된 부분이다. 이 부분은 위의 루소의 생각을 바탕에 깔고 읽어야 이해가 쉽다.
“이 특유한 게다가 거의 무제한 능력(스스로를 개선해가는 능력)이 인간이 지닌 모든 불행의 원천이라는 것, 또한 시간의 힘으로써 인간을 이 평온하고 죄 없는 나날로 채워지는 그 원초적인 상태로부터 끌어내는 것이 이 능력이라는 것, 또 지식의 빛과 오류, 악덕과 미덕을 여러 세기에 걸쳐 발달시켜 마침내 인간을 자신과 자연에 대한 폭군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야말로 능력이라는 것, 이런 것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슬픈 일이다.”(<인간불평등 기원론>1 / <세계철학사3>, 이정우, 도서출판 길)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 주장이다. 아무튼 루소가 바라본 세상은 이러한 세상이다. 그 다음에 언급된 내용은 이해가 쉽다. 사실 아주 익숙하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실제의 자기와 다른 것처럼 보여야만 했던 것이다. 자기의 실제 존재와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전혀 다른 두 가지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 구별에서 (사제들이나 귀족들에게 볼 수 있는) 엄숙한 겉치장과 기만적인 책략과 그것에 따르는 모든 악덕이 나왔다.(...) 중간층 역시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교활하고 비루해지며,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횡포하고 냉혹하게 되며, (...) 참된 필요성에서가 아니라 타인 위에 서기 위해 저마다 재산을 늘리려하는 열의가 결국 서로에게 해를 끼치려는 나쁜 경향을 불러일으키고, 또 한층 확실하게 성공을 거두기 위해 자주 친절한 가면을 쓰는 일이 있으므로 더욱더 위험한 숨은 질투심이 솟아 오른다.”(<인간불평등 기원론>2, <세계철학사3>, 이정우, 도서출판 길)
이러한 것들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인간의 그럴듯한 ‘겉’에 속아 신뢰를 주다가 그와 다른 ‘속내’를 보고 거리를 두어 본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대단한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장 그 자리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만만하다고 생각하는 상대를 찍어 누를 때 나오는 내면의 어떤 것. 그것이 자기애가 변질된 이기심, 자애심가 변질된경쟁심과 질투심의 결과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참된 필요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인 위에 서기 위해 저마다 재산을 늘리려 하는 열의가 결국 서로에게 해를 끼치려는 나쁜 경향을 불러 일으”킨다는 루소의 주장 또한 쉽게 납득이 된다. 타인과 비교하는 마음에 욕심내는 것들 중 정말로 필요한 것이 몇이나 될까?
루소는 이러한 욕심이 인간을 타락시켰고 동시에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주장했다.
몇 년전 'DMZ국제 다큐 영화제'에서 <내 친구 정일우>(2017)라는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 사실 정일우 신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관심도 없었는데 그 영화를 보게된 이유는 따로 있다. 그즈음 다큐멘터리 감독이 나오는 드라마를 쓰려고 이런 저런 자료를 찾아 보던 중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1988)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다. 나는 우리나라 다큐영화의 선구자(?)인 감독의 신작이 궁금해져 극장에 갔다. <내 친구 정일우>를 보고 나서야 알게된 사실이지만 정일우 신부 또한 <상계동 올림픽>(1988)과 관련가 깊다.
<상계동 올림픽>은 상계동 철거 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88년 서울올림픽 전에 대대적인 도시정화 사업이 있었는데 상계동 철거가 그것의 일환이었다. 정일우 신부는 상계동 철거민들과 함께 사라져 가던 그들의 터전에 있었다. 철거민들은 콘크리트 더미가 된 자신들의 집 위에 천막을 치고 생활했다. 어느 날 철거 용역들이 와서 그 천막들마저 다 부수고 빼앗아가버렸다. 하늘을 가리고 누울 마지막 것마저 빼앗겨버린 그들은 통곡을 했다. 정일우 신부는 서럽게 우는 그들을 불러 모아 설교를 했다.
우리는 마지막 가진 것마저 빼앗겼으므로
더욱더 자유로워졌다. 그러니 감사하자.
이 장면은 정일우 신부의 일대기를 그린 <내 친구 정일우>에 나온다. 나는 극장에서 이 장면을 보고 솔직히 너무 한다 싶었다. 더 가난해졌으므로 더 자유로워졌다니! 살 집도 모자라 하늘을 가릴 천막마저 뺴앗긴 사람들에게 할 소린가. 그런데 그 다음 장면에 나의 생각이 바뀌었다.
철거민들은 콘크리트 더미 위에 이불을 깔고 옆으로 몸을 붙여 나란히 누워 잠자리를 만들었다. 아래 위로 비닐을 깔고 덮어 이슬을 막았다. 그렇게 순서대로 한줄로 눕고 그 위로 이불과 비닐을 차례로 덮는 그들의 표정이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웃고 있었다! 깔깔거리며, 운동회하는 아이들처럼. 그 모습을 보는데 가난해졌으므로 자유로졌다는 신부의 말이 진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 영화를 볼 때가 드라마 보조작가를 하지 않기로 다짐하고 학원 강사를 막 시작한 즈음이었다. 처음으로 취업한 학원은 일이 너무 많은 곳이라 일주일에 두 번 이상은 일찍 출근하거나, 야근을 해야만 했다. 그곳에서 생활에 모든 것이 소진되어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는 시간이 이어지자, 나는 불안해졌다. 이대로 글쓰기를 놓는 것은 아닌가? 내가 이러려고 이곳에 있는게 아닌데.
영화를 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사직서를 냈다. 그때 원장님께 이렇게 말했다.
“여기서 일을 하면 내가 누구인지, 왜 여기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 돼요.”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돈을 벌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가난한 자유를 취하리라. 욕심이 인간을 타락시켰고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었다며,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주장을 당시의 내가 실현했는지도 모른다. 루소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제적인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학원에 다니면서 모아놓은 것은 금새 소진되었다. 이후로 2년간 일을 해서 충분한 돈이 있으면 글 쓸 시간이 너무 없고, 글 쓸 시간이 없으면 찢어지게 가난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다 충분히 글 쓸 시간과 생활할 만큼의 돈벌이의 밸런스를 맞출 수 있게 된지 3년째다.
철학 수업에서 만난 분 중에서 소설가를 지망생이 있다. 50대의 결혼하지 않은 여성분으로, 주중에 하루 월요일을 쉬는 날로 정해서 소설 창작 수업과 철학 수업을 듣는다. 내가 드라마 작가 지망생이라는 것을 안 이후로 친밀함을 표시하곤 하셨는데, 그분과의 대화 사이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모 방송사에서 신입 작가를 발굴하기 위한 공모와 지원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1500명에서 2000명 정도가 지원하면 그 중 20명을 뽑는다.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들어가는 프로그램. 그러나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기간인 6개월간 한 달에 150만원의 월급을 주는 대신에 직장에 다닐 수 없다. 또한 이후 계약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6개월의 경력 단절을 감수할 만큼의 보상인지에 대해 여러 가지 이견들이 있을 것이다. 다른 방송사 공모전들 또한 당선자들에게 지원 프로그램과 비슷한 인턴 작가라는 제도가 있는데, 대부분 직장에 다니지 못하게 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대화에 언급된 그 방송사만의 아집인 것이다.
소설가 지망이신 그 분은 친구로부터 이 방송사의 이야길 들었다면서, 매우 부당하다고 말씀하셨다. 직장에 다니지 못하게 하는 것도 문제지만 150만원의 월급으로 어떻게 먹고 사냐는 것이다.
순간 의아해졌다. 문득 가난한 자유를 택하여, 자발적 가난자로 살아가면서 사회적 경제 관념과 나의 삶이 매우 동떨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한편으론 충분함이란 참 상대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나의 일부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사회 바깥으로 나가 루소가 주장하듯 자연이 상태로 돌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자연(自然)의 진짜 뜻은 “스스로 그러하게하다.”가 아니었던가.
이제 그 삶을 끝낼지 말지,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
남은 올해의 날만큼 결정의 순간이 남았지만, 이미 마음으로 결정된 것 같기도 하다.
이미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고, 이제 올해도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 관련 강의
[세계철학사 대장정 : 경험적 주체와 선험적 주체(1)] 중 6강
(2022년 7월18일 / 대안연구공동체 / 강사 : 이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