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8_철학 입문자의 NOTE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 있어?”
장의준 선생님의 가을학기 수업 ‘죽음 : 철학적 질문들’의 첫 번째 시간이 끝난 후 식사 자리에서 받은 질문이다. 질문자는 같이 수업을 들은 수강생인데, 그는 한 번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사실 나는 죽음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최근에 떠올렸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30대 후반임에도 결혼하지 않은 나에게 흔히 하는 협박은 고독사에 관한 것이다. 늙어 혼자 있다 하게될 고독한 죽음에 대한 괴담. 발견되지 않은 시신이 썩어 악취를 낼 것이다. 위독한 상황에 도움을 받지 못해 돌연사할지도 모른다. 등등. 어느 날 문득 혼자 사는 내 자취방에서 눈을 뜨는데, 여기서 혼자 죽는 것이, 협박으로만 들어왔던 고독사가 별로 두렵지 않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왜 두렵겠는가 말이다. 그냥 끝내면 되는걸. 그냥 끝인걸.
한때 죽음이 공포스러웠던 적이 있다. 이유는 죽음 자체 보다는 그 과정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학교에서 6.25전쟁 교육 비디오를 보고 전쟁에서 죽는 것이 두려웠다. 전쟁에서 죽는 자는 으레 공격당해서 죽는 거니까 아플 것 같아서 그랬다. 언제인지 석가탄신일 특별 편성 불교 영화(제목도 내용도 모르겠다. 그저 지옥이 나왔다는 것 밖에)를 보고 나서 죽음이 무서웠다. 지옥이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다.
‘죽음: 철학적 질문’의 1강 주제는 ‘죽음을 망각하는 인간’이었다. 인간은 죽음을 날것 그대로 바라보지 않고 극복 가능(?)한 것으로 가공하고, 심지어 없애려 하고 있다. 극복 가능한 것으로 가공한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 특히 문화 예술이 죽음을 둘러싼 인간의 부정적 감정을 긍정적으로 극복이 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류학자 L.V토마스 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셨다) 없애려는 경우는 으레 종교다. (이것은 장 보드리야르의 주장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망각되지 않은 죽음을 이야기한 사례로 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의 죽음> 중 독백을 소개했다. 죽어가는 자신을 자각하며 공포와 혼란을 느끼는 이반일리치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부분이었다. 이는 죽음이 반드시 부정적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는 전제에서 출발된 규정이다. 그러나 모두가 죽음을 공포스러워 하는가?
철학 수업을 듣게 시작한지 반년이 넘어가는 지금 처음으로 질문이 생기는 수업을 들었다. 그러고보면 이 수업의 제목이 ‘죽음 : 철학적 질문들’이었다!
아마도 내가 죽음에 대해서 가장 많이 생각했던 시기는 20대 중반이었던 것 같다. 스물넷을 시작으로 몇 년 간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삼촌, 심지어 사촌오빠까지 죽음을 경험했다. 그 중엔 모두가 호상이라고 하는 죽음도, 갑작스레 맞닥뜨리게 된 죽음도 있었다.
죽음과 장례는 참으로 이상한 아이러니의 관계에 놓여있다. 죽음은 누군가와의 영원한 이별이지만 장례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은다. 이러한 모티브로 당시 나는 여러 편의 단막극 드라마를 썼다. 그만큼 그 죽음들은 내게 강렬한 경험이었다.
당시 쓴 그 드라마에 등장했던 주인공은 대체로 죽음을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실제 장례식장에서는 그게 나였다. 누군가를 영원히 잃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당시 나는 잘 알지 못했다.
10년도 더 지난 잇다른 죽음의 경험이 떠오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냐는 질문을 받고 집에 오는 길. 문득 내가 한동안 몇 년에 한번씩 유서를 썼다는 것이 떠올랐다. 추석을 앞두고 조금 일찍 고향 부모님댁에 온 날, 학창시절부터 쓰던 방을 정리하다가 그 유서를 발견했다. 마지막으로 쓴 유서가 잇다른 죽음을 경험하던 스물 다섯 살 때 쓴 것이다.
부끄럽지만 당시의 내 유서를 인용하려 한다.
“25세, 20대의 중간을 통과하면서 한번쯤은 되돌아 보아야 하며 또 대비해야 할 나의 생. 그런 의미로 쓰는 유서이지만, 혹시나 있어서는 안될 불상사가 생긴다면 되도록 유서의 내용을 이행해 주기를 바란다.
장례식이나 병원비 등 죽음에 드는 비용은 내가 벌어 놓은 돈으로 이행해주기를 바라며 남은 돈이 있다면 마땅히 부모님께 가야할 것이다. 낳아주고 길러주신 빚을 살아가며 차차 갚아 나갈 예정이지만, 충분하지 못할 것이므로 유산은 물론, 그 사이 나에게 생긴 모든 권한 (저작권 등)은 모두 부모님께 양도한다.
내가 남긴 그 외의 모든 사진이나 원고 등은 소각 혹은 소멸시켜 주어야 한다. 내가 보던 책이나 듣던 음반 등 소장 자료들은 절대 소각하지 말아야 하며, 되도록 필요한 이에게 갈 수 있도록 기부할 수 있는 곳을 찾아주길 바란다.
부고는 네이버 나의 블로그에 서로이웃공개로 포스팅해주길 바라며 혹, 작가가 된다면 신문 부고란에 기재해주길 바란다. 가까운 친구는 그곳을 통해서 연결되며 대학 친구는 따로 연락해야 하지만, 그 방법은 생략한다.
혹 사고사로 혼수상태라면 나는 그 상태로 내 육신이 살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에게도 고통을 주고 싶지 않으므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안락사해주길 바란다.
살면서 늘 신중하려 노력했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로 인해 상처 입은 이가 있다면 진심으로 미안함을 표한다. 그리고 결코 내 뜻이 아님을 밝힌다. 나의 무뚝뚝함이 불러일으킨 오해가 많다. 허나 나는 나를 걱정하고 이해하려 애써준 모든 이를 사랑했음을 이야기하고 싶다. 진심으로 소통하길 원했으나, 모진 성격과 무거운 입으로 그러질 못했음을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나의 죽음을 오래 슬퍼하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살아갈 것이므로 나는 생에 미련이 없을 것이다. 그저 즐겁게 살다 편안히 돌아갔다고 생각해주었으면 하며, 너무 오래 슬퍼해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아주길 바란다. 나는 이미 없을 것이고, 그 슬픔은 모두 부질없으니”
많이 다듬은 문장으로 쓴 유서였다. 지금 보니 이십대중반의 내 문장 습관까지도 고스란히 엿보이는 유서. 나는 이것을 통해 그때의 나에 대해 몇 가지를 알 수 있었다. 그 중 가장 의미있는 발견은 당시 내게 죽음은 지난 생을 반추하고,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훌륭한 도구였다는 점이다. 작가가 될 것을 희망하여 응당 열심히 살 것이므로, 죽는다고 해도 별 미련은 없을 거라는 말에서 심지어 나의 삶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당시 내가 좋아하던 말 중에 하나가 “후회하는 시간도 후회할 시간”이었다)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는 20대 중반의 내가 참 귀엽고, 일면 부럽기도 하다.
선생님께서는 본격적인 수업의 도입에 스피노자의 이 말을 소개하셨다.
현명한 인간이 죽음만큼 생각하지 않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그의 지혜는 삶에 대한 숙고에 있는 것이지 죽음에 대한 숙고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Cf. Baruch Spinoza, Ethica(The Ethics), IV, prop. 67.) (* 강의안에 인용된 내용 재인용)
이미 충분히 설명한 이유로 나는 이 문장에 동의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나는 현명하지 않은 인간일까? 판단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연휴가 끝나서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가기 전, 그게 안 된다면 적어도 올해가 끝나기 전에 다시 유서를 써보려 한다. 그런데 어떤 내용을 써야 할까? 반추할 지난 생은 더 많아졌지만, 그려야 할 미래가 더욱 불분명해졌다.
*강의 인용
[죽음 : 철학적 질문들- 1강]
(2022년 9월 5일 / 고양아람누리 문예아카데미 / 강사 : 장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