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초면입니다만

20220928_철학입문자의 NOTE

by 오랜

임마누엘 칸트. 그저 이름만 많이 들어본 철학자이다. 어쩌다 보니 내게 2022년 가을은 칸트의 계절이 되었다. 이정우 선생님의 ‘세계철학자’ 수업의 다음 단계가 칸트와 포스트 칸트의 시대이고, 더불어 아람누리 문예아카데미에서 하는 칸트의 저서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의 강독 강의까지 신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말로만 들어본 칸트를 처음으로 만난다.


장의준 선생님의 죽음을 주제로 한 강의까지 합하면 세 개다.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만간 글쓰기 위주의 생활을 접고 취업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철학 강의를 주중에 듣는 이 생활 또한 언젠가는 청산될 터. 마지막일지 몰라 욕심을 좀 내봤다. 그러다 대참사가 일어났다. 9월까지 마무리해야 하는 공모전 때문에 책을 읽고 수업에 참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심지어 추석 연휴 때문에 강의가 딜레이되기까지 했다. (2강이 연달아 있었다면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서 들었을 텐데, 강의 자체를 완전 잊어버렸다) 덕분에 1강의 실시간 수업 놓치고 (이건 사실 철학사 수업이랑 겹쳐서 원래 못 듣는다) 다시보기 기간도 지나버렸다!! 결국엔 1강을 30분도 채 듣지 못한 채로 2강을 바로 듣게 되었다.


1강의 강의 내용은 예상컨대 철학사적 관점에서의 칸트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래도 그나마 ‘세계철학사’ 수업을 병행하여 듣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같은 철학자를 다루고 있어서 비슷한 내용의 강의를 듣긴 했으니까. 결국 1강을 다 듣지 못한 채로 2강을 듣기 시작했다.




"체계적으로 기획되고 그러면서도 또한 실용적 관점에서 (독자 누구나가 찾아낼 수 있는 사례들과 연관 지음으로써) 대중적으로 작성된 인간학은 독자(讀者) 공중(公衆)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점을 갖는다. 즉 인간의 이런저런, 실질적인 것과 연관하여 관찰된 속성이 그 아래 배열될 수 있는 제목들의 완벽성을 통해, 모든 특수한 것들도 인간학의 전문 분야에 넣기 위해 하나의 고유한 주제로 만들 계기들과 요구들이 독자 공중에게 주어진다는 것.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학에서의 작업들이 저절로 이 연구의 애호가들 사이에 확산되고, 계획의 통일성에 의해 점차로 하나의 전체로 통합되어 간다는 것, 그렇게 해서 이 공익적인 학문의 성장이 촉진되고 가속화된다는 이점 말이다.“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 임마누엘칸트, 백종현 옮김, 아카넷, p111)


칸트가 직접 작성한 이 책의 머리말이다. 인용한 문단의 첫 번째 ”체계적으로 기획된 것“은 강사님 말씀에 의하면 학문이다. 논리적으로 체계적으로 정리된 규정들, 개념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독자 공중, 책을 읽는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실용적 관점에서 대중적으로 작성된 이론은 당대의 기준으로 이렇게 체계화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체계성은 떨어지지만 실용적인 것이라는 의미인데, 사실 지금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체계와 논리는 독자 혹은 이론의 사용자들이 조금 더 잘 이해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 이해하면 그것을 실생활에 실용적으로 적용할 수도 있을 터인데, 왜 당대엔 이것이 상반된 개념이 되는 것인지 의아하다. 그러나 그 이유 또한 강의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성주의, 합리주의자의 이론과 지식은 체계적이고 확실하지만, 실용적이고 대중적이지 않지 않았고, 경험주의자가 내세우는 지식들은 쓸모가 있지만 체계적이고 확실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체계와 실용이 상반된 것으로 치부된 것 같다.


그런데 칸트는 <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을 당대의 철학자들의 약점을 없애고 종합한 완벽한 책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이에 관해 헤겔의 추종자(?), 유물론자인 슐라이어마허는 ‘잡동사니’라 평했다. ”체계적이고 이론적인 것과 실용적으로 대중적인 것을 종합하려고 하는 불가능한 욕망의 소유자“라고 하면서 폄훼한 것이다. 도전은 때로 시대의 환영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




이 강의에서 흥미로웠던 지점은 이 책뿐만 아니라 ‘세계철학사’ 강의를 통해서 배우고 있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가장 기본적인 틀 또한 이러한 칸트의 "불가능한 욕망"의 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바로 인식의 선험적 조건, 사물 인식에서 작동하는 ‘의식 일반’의 구조를 다루었다. 칸트에게 이 조건, 즉 인간의 인식능력에는 크게 감성과 오성 그리고 사변이성(순수이성)이 있다. 감성은 대상을 지각해 주체의 마음에 인식질료=‘데이터’를 제공한다. 오성은 그것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해 구성한다. 그리고 사변이성은 인식질료가 주어지지 않은, 즉 경험에 주어지지 않은 형이상학적 차원에 대해 사변한다. 감성은 지각(또는 ‘직관’)하고, 오성은 개념화(‘구성’)하며, 사변이성은 사변한다. (...) 칸트에게서 정당한 인식은 감성과 오성의 결합으로써 정립하며, 사변이성의 사변은 ‘인식’의 위상을 부여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사ᅟ견 이성에 그 나름의 임무를 부여함으로써, 형이상학을 부정하기보다는 갱신하고자 했다.“ (<세계철학사3>, 이정우, 도서출판 길, p448)


감성은 흔히 쓰는 ‘감성적이다’의 뜻과 다르다. 비가 와서 땅이 젖는 상황을 보고서 ‘비가 온다’, ‘땅이 젖는다’라고 인식,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후 우리는 오성으로 ‘비가 옴’과 ‘땅이 젖음’을 구성, 종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이렇게 변화한다. ‘비가 와서 땅이 젖는다’ 두 가지의 인식 질료가 인과 관계로 ‘구성’되었다. 이것이 오성이다. 그렇다면 사변이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경험으로 알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차원의 것. 예를 들어서 우주, 영혼, 신에 관한 지식들 이론들을 의미한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형이상학적인 존재라서 그런 것들을 알고 싶어하다. (아직 다 배우진 않아서 이 정도까지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에서 체계화되기 이전의 ‘감성’이 앞에서 언급한 실용적이고 대중적인 것, 말하자면 경험주의적인 것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지식이 되려면 반드시 오성의 구성 작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의 나름의 야심작 <순수이성비판>은 출간 당시 사람들이 거의 읽지 않는 책이었다고 한다. 슐라이어마허가 그러했듯 칸트의 이론은 이쪽저쪽에서 가져와 짬뽕(?)시킨 것으로 치부되었다. 다만 칸트의 추종자들에게는 찬양받았다고 한다. 그들은 칸트가 약점을 제거하고 장점만을 종합해서 거대한 인식론적인 사유체계를 만들어 냈다고 말했다.


근대철학을 깊이 있게 공부한 사람들이 어떤 쪽에 동의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언젠가 장의준 선생님께서 <순수이성비판>을 두고 근대철학의 교과서와 같은 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후자에 조금 더 가깝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강의 인용


[철학 명저 제대로 읽기 : 칸트<실용적 관점에서의 인간학>]

(2022.9 / 고양 아람누리 문예아카데미 / 강사 : 이현복)


[세계철학사 대장정 : 칸트 철학과 포스트 칸트철학]

(2022년 6월 3일~7월18일 / 대안연구공동체 / 강사 : 이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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