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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랜 Nov 16. 2022

인간은 무(無)이다

221115_철학 입문자의 NOTE(죽음을 통한 삶과 인간에 대한 규정)

9월에 시작한 ‘죽음: 철학적 질문들’이라는 수업이 중반 정도에 다다랐다. 이제 수업은 비슷한 구성으로 진행이 된다. 그날 주제가 되는 철학자를 소개하고 그의 삶과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을 다룬다. 그것을 통해 도출해낸 죽음에 대한 철학을 다룬다. 계기는 아마도 신과 사후세계를 부정하는 철학자들의 철학으로 주제가 옮겨가면서인 것 같다. 사후세계니 영혼이니 하던 전반부의 수업이 영 흥미가 없던 나는 죽음과 삶을 같이 다루는 중반부의 수업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은 종교와 상극인 나의 기질과 관련이 있다.) 10월에 마감해야하는 글 때문에 집중력의 한계치까지를 다 쓰고 수업 듣다보니 알아듣지 못한 채로 넘어간 부분이 많다. 그래서 마감과 마감 사이 짬이 좀 난 요즘 온라인 다시보기를 통해서 급히 복습 중인데, 그 중 흥미로운 내용들을 정리하고 넘어가 보려 한다. 


죽음을 통한 삶과 인간에 대한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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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통한 삶과 인간에 대한 규정 1-  헤겔

인간은 무(無)이다



헤겔은 자연과 인간을 다름을 이야기했는데, 이 차이는 죽음으로부터 비롯된다. 

(이 논의를 이해하려면 죽음, 무(無), 부정성과 같은 단어가 유의어처럼 쓰인다는 점을 참고하길 바란다.)      


첫 번째 인간은 자연을 부정한다. 이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상용하지 않고 가공한다는 의미이다. 그로 인해 인간은 자연 세계 이외의 또 다른 세계(아마도 문명 세계)를 만들었고, 이것이 역사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도 부정한다. 이는 인간이 자연에게도 그러했듯 스스로도 끊임없이 재창조하고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이를테면 태어나 그저 아기였던 내가 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된는 것. 직업도 바꿀 수 있고, 상황과 처지를 바꿀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의미한다. 헤겔은, 무로 변화한다, 무(無)화 활동이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끊임없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무화되는 것은 ‘대자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즉자적’, 말하자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은 그대로 있다. 그저 대자적 존재, 말하자면 대상적 존재만이 바뀔 뿐이다. 쉽게 말해서 나의 본질적 존재를 그대로이지만, 남들의 대상으로서의, 타인이 발견할 수도 있는 나의 모습을 끊임없이 무화,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즉자적 존재에서 끊임없이 초월하려 한다는 의미와 같다.     


무화 하는 인간. 이것이 중요하다. 헤겔은 사후의 삶을 부정했다. 그는 인간이 죽고 나면 ‘무’로 간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무화되며 궁극적으로도 무가 된다. 헤겔은 우리가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완전함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완전함은 일종의 ‘만족’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지에 이른 존재를 그는 ‘절대 정신’이라고 한다. 절대 정신은 기존의 신을 부정한 헤겔에게 일종의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것은 죽을 수밖에 없는 신, 결국 인간인 것이다!      


그러나 ‘만족’은 누군가의 인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만약 우리가 그저 나 이외의 것을 지배하고 소비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끊임없는 반복일 뿐이다. 지배 소비의 욕구는 끝이 없고 대상은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니까. 그러다 보면 결국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대상이 완전히 제압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는 인간이 자기 의식의 완성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관점을 바꾼다. 대상 스스로가 스스로를 부정한다면? 자기 부정을 통해서 타인인 나를 인정한다면? 그렇다면 대상을 제압하지 않고도 인정받고 자기 의식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인정 욕구를 갖게 되었다.      


강사께서 이렇게 설명은 해주셨으나 사실 아주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 다만 이런 생각은 해볼 수 있었다. 그저 상대를 제압하고 소비하기만 하는 존재는 인간 이외의 생물들이 아닐까 한다. 인간은 자연을 부정하는 고유한 능력 가졌다. 그런 인간이 저렇게 살아간다면 인간 이외의 것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어쨌든 인간은 타자의 인정이 없으면 스스로 자유로우며 이성적인 절대적 자립성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절대적 자립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으려는 인정욕구를 갖게 된다. 그런데 이는 목숨을 건 생사 투쟁이다. 결국 절대 정신을 가진 참된 인간이란 자신이 참된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사람인 것이다. 즉자적 존재에서의 초월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이기도 하다.    



       


극의 가장 기초적인 작법 중이 이런 것이 있다. 


‘주인공은 반드시 변화해야 한다!’ 


자신의 비밀이나 내면을 알아차리거나, 현재의 자신을 초월해 극복하고 성숙하거나, 로맨스라면 인연을 쟁취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극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은 대개 변화한다. 그래서 가장 처음 이야기를 쓸 때 고려해야할 점 중에 하나가 주인공의 변화이다.      



또 하나 최근 내가 극을 쓸 때 고려하는 주인공의 특징이 하나 있다. 작년 이맘때쯤 한 영화 감독의 상업 영화 시나리오 강의의 홍보를 위한 특강을 들은 후부터다.     


사실 본 강의를 수강 신청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특강과 시간 맞아 현업에서 일하고 있는 선배의 이론을 한번 들어나 보자 싶어서 간 것이다. 강의 내용에 아주 새롭다고 할만한 것은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10년 이상 글을 쓰며 작가나 감독이 하는 이런 류의 강의를 꽤 많이 들으러 다녔고, 기본 작법 위주라면 겉포장인 말만 다르게 할 뿐 내용은 비슷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날 한 시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가서 강의를 들은 보람이 있었다면 딱 한 줄의 배움 때문이다.     


“주인공은 목숨을 거는 사람이다.”     


이 말을 초보 작가 지망생이 듣는다면 말 그대로를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사실 이는 주인공의 능동성과 절박함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런 주인공이 관객을 쉽게 빨아들인다. 주인공이 원하는 것은 직관적이고 단순한 것일수록 좋다. (가족의 생존, 돈, 때론 사랑 같은 단순한 욕망) 그것을 얻기 위해서 목숨도 걸 각오가 된 사람이야말로 극, 상업적인 극의 주인공이라는 의미이다.          




헤겔이 말하는 절대정신을 가진 참된 인간은 극 속의 주인공과 닮았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인간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인정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했던가! 사실 주인공이야말로 자신만의 매력으로 모두에게 인정받아야만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의 절박함의 아주 궁극적인 목적은 관객의 인정이다. 


물론 이 인정과 그 인정의 의미가 완전히 통하는지는 입문자인 나로썬 확신할 수 없지만.    




* 글 속에 언급된 헤겔의 철학은 헤겔 주석가 중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해석에 따른 것임을 밝힌다.




*강의 인용

[죽음 : 철학적 질문들- 6강] 

(2022년 10월 31일 / 고양아람누리 문예아카데미 / 강사 : 장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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