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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랜 Nov 07. 2022

나만의 애도를 시작하다

1029참사를 기억하는 법_20221106

마감 다음날인 11월 1일, 오랫동안 미루던 영화 관람을 하기 위해 집을 나썼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2021년 DMZ국제다큐영화제 상영할 때부터 벼르고 벼르던 것. 이 영화는 어느덧 숙원이 된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 시나리오와 소재적으로 겹치는 것이 많았다. 극영화라면 고민스러웠겠으나, 다큐멘터리라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펙트를 녹여 픽션에 사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제 기간을 모두 놓치고, 정식 개봉 12째 날이 되어서야 겨우 보게 되었다.      


내가 사는 고양시에선 상영이 끝나 CGV명동씨네라이브러리까지 가야 했다. 명동을 나가는 김에 명동성당 안을 들어가보고 싶었다. 서촌 카페 야외 테이블에서 낮술로 맥주도 한잔하고 싶기도 했다. 16부작 미니시리즈를 12부작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16부작 버전을 수정한 후, 1부부터 4부까지의 대본을 써내려가는 동안 그럴듯한 휴식 한번이 없이 달려왔다. 그렇다고 작업이 완전히 마무리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시간을 스스로에게 주지 못한다면 또 다음을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영화를 보고 명동성당을 둘러본 후, 걸어서 서촌으로 갔다.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서울 역사문화박물관 옆 길로 세종문화회관 뒤쪽 길을 따라 걷는 코스를 좋아해서, 우선 시청 쪽으로 갔다. 시청 앞 광장에 흰 천막안에 흰 국화로 장식된 제단이 눈에 띄었다. “이태원 사고 사망자 합동 분향소”라는 글자도 보었다. 며칠 전의 사고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졌지만 다가가지 않았다. 반감이 일었다. 참사 대신 ‘사고’라고 쓰고 희생자 대신 ‘사망자’라고 쓰인 영정도 위폐도 없는 그 분향소에서 국가가 강요한 애도는 하고 싶지는 않았다.     



또다시 참사  


10월 30일 오전, 눈을 뜨자마자 사고 소식을 접했다. 할로윈 행사 때 이태원에 모였던 사람들이 거리에서 압사 당해 사망했다. 처음 본 기사엔 149명이었다가, 얼마 못 가 151명이 되더니 점점 더 늘어났다. 해마다 할로윈이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이태원이다. 거기서 갑자기 무슨 이유로 그 많은 사람들이, 그것도 길거리에서 죽는단 말인가. 건물이 붕괴된 것도 아니고, 불이 난 것도 아니고, 천재지변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분명 시스템의 문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김없이 세월호 사건이 떠올랐다. 당시 서른 살이던 내가 서른여덟, 40대 나이에 가까워졌지만 나는 세월호 사건만 떠올리면 어김없이 흐트러져 눈물부터 흘린다. 그 배에 내 가족이 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느꼈던 충격과 무력감, 사회에 대한 절망이 트라우마처럼 남아 있다. 



또다시 떠오르는 질문, '국가란 무엇인가?'


질문을 가로막은 정부는 필사로 책임을 회피한다. 주최가 없는 축제라서 안전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없다, 사람들이 스스로 모인 일종의 현상이다, 납득하기 어려운 입장만을 내뱉던 정부는 급기야 국가의 책임을 묻는 외신기자 앞에서 농담을 던지고 웃음까지 흘렸다. 그들은 거리에서 100명이 넘은 사람이 사망하였음에도, 그 사건이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치부되어 자신들이 피해당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다. 마침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라는 사회 시스템에 우리의 권리를 일부 양도한 

대신 국가가 해야 할 의무는 무엇인가?     


회피 작전이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자 정부는 대신 화살을 맞아줄 타켓을 찾는다. 그나마 자리를 지켰던 119 신고센터 직원,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청을 높였던 이태원 파출소 경찰들. 심지어 상황을 모른 채로 뒤에서 밀라고 외쳤던 시민을 찾는 움직임까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그들의 잘못을 반증하고 있다. 119 신고센터 직원과 파출소 경찰이 그 자리에서 시민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의 안전을 지키려 애쓰던 시간에 국가는 없었다. 대비의 탓이든, 대처의 탓이든.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하는 국가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그 자체로 정부는 책임져야 한다. 모두가 국가의 부재를 말하며 책임지라 하고 있는데, 자신들은 거기에 없었으니 책임도 없다고 말하고 싶은가? 어불성설이다. 관점을 흐린다고 해서 그대로 속아주진 않을 것이다. 


사건의 실체는 보다 복잡하고 다양한 관점으로 밝혀내야겠지만, 그렇게 시간을 벌며 회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곳에서 최선을 다한 이들이 우선 내몰리는 현실이 또다른 비극을 낳을까 두렵다. 


               

세월     


10.29 참사의 유족들이 받는 돈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또다시 트라우마를 일깨운다. 2014년, 세월호 사건 당시 하나로 슬퍼했던 국민의 반응이 갈라지고, 피해자 가족들이 비난받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가 바로 그 돈, 보상금 문제가 뉴스에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돈을 노린다는 편견은 오랫동안 이어져 대표적인 시선으로 자리매김했다. 심지어 세월호를 다룬 극영화 <생일>에서 언급될 정도다.

      

사실 이해하기 어렵다. 어떻게 그들이 돈을 노린다고 생각하는가? 시간 되돌려 세월호가 떠나는 날 인천항에 있었다면, 그 배가 가라앉을 것을 알고도 돈을 받기 위해 자식을, 부모를, 가족을 태우겠는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게 될 진심이다. 그럼에도 그때 광화문에서 단식을 하던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의 앞에서 누군가는 폭식 시위라며 피자와 먹어댔었다. 폭식 시위를 보도한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이것’을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 내가 보고 있는 이것이 사람인가? 아니면 악마인가?     


서양의 기념일에 기괴한 차림으로 나가 먹고 놀고 마시러 갔다가 죽었다며, 그들의 탓하는 여론도 있다고 한다. 그러게 왜 거길 갔냐고 묻는 이들을 보며 또다시 생각한다. 사람이 맞는가? 슬픔에 잠겨있을 유족을 생각하면서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이다. 지금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세월호 당시 폭식 시위를 했던 그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어째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는가? 300여명의 사람들을 잃고, 그 긴 시간을 지나왔음에도 어째서. 그들에게 쏘아붙여 주고 싶다. 어쩜 그렇게 우매하고 모자라냐고 탓하고 싶다.      


‘국가 애도 기간’이라는 낯선 시간을 정해 놓고, 그 기간 동안 아무것도 묻지 말고 밝히지도 말고 “가만히 있으라” 강요한다. 애도란 사람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산 자가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행위이다. 그런데 질문하지 말라니, 왜 죽었는지는 알아야 그 죽음과 작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시시때때로 세월호 사건을 소환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우리는 그 배에 탄 사람들 300여명을 잃어야 했던 납득 가능한 이유를 듣지 못했다.             



-

        

<스프와 이데올로기>의 양영희 감독의 어머니 강정희씨는 제주 4.3사건을 겪고도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숨겨왔다. 강정희씨는 제주에서 보았던 죽음과 상실, 살기 위해 수십킬로를 걸어 일본으로 되돌아와야 했던 절박함을 포함한 그 시간을 진술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기억은 꽤 생생했다. 결코 잊을 수 없었으나 말하지 못했던 죽음을 드디어 입 밖으로 내뱉은 것이다. 딸은 이 증언을 통해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조총련계의 활동가로 살며, 아들을 북으로 보내고, 여전히 방에 김정일과 김일성 초상화를 걸고 사는 어머니. 그녀의 삶이 고집스레 한 방향으로 향한 이유가 제주에서 보았던 수많은 죽음이었을지 모른다고.

     

어렵게 꺼낸 그 말들로 인해 강정희씨를 둘러싼 세계가 바뀐다. 그녀는 여전히 제주4.3이 금기라 믿고, 이것을 누구에게 발설하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해왔다. 그러나 그것이 아님을 딸로부터 듣고, 4.3연구소 연구원들을 만나고, 마침내 가족의 고향인 제주에 갔다. (강정희씨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진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강정희씨는 치매에 걸려 제주에 온 즈음엔 4.3도 잊은 후였다. 비로소 잊을 수 있게 되었다. 더이상 그녀는 제주 4.3의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을까?   


우리의 역사엔 쉽게 떠나보낼 수 없는 죽음들이 많이 있다. 

2014년에도, 1948년에도 그 외에 어떤 시간들에도.          


2022년에 일어난 이 일 만큼은 그렇게 처리되지 않길 바란다. 더이상 절망하고 싶지 않다. 우리 사회가 더 나아졌음을 느끼고 싶다. 그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나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하는 중이다.      


이것이 내 방식의 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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