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 우먼의 탄생!

그림책 <소피의 달빛 담요>

by 평온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아라크네는 인간에게 베 짜기를 가르쳐준 신, 아테나와의 베 짜기 대결에서 이긴다. 그리스 신화에서 실력으로 신을 이긴 유일한 인간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대결 중 아테나가 신들의 영광을 수놓은 데 반해 아라크네는 신들의 불륜과 부정, 위선 등을 수놓는다. 분노한 아테나는 직물을 찢고 북으로 이마를 때려 치욕을 느끼게 했고, 아라크네는 목을 매 자살한다. 이에 아테나는 아라크네를 거미로 만든다.


거미가 집을 짓는 기술, 실을 이용해 하늘을 활공하는 모습이 얼마나 놀랍고 신기해 보였으면, 고대인들은 거미를 신화에 등장시켰겠는가.

몇 년 전이던가, 우도에 놀러 가 우도봉을 걸어 내려오는 길에 본 거대하고 튼실했던 거미줄과 그 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있던 울트라캡숑 거대 거미와 눈이 마주쳤다. (나의 착각이겠지만...) 파리도 아니면서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그 자리를 벗어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작년 겨울, 친구의 귤밭에서 하루 귤 따기를 하는 동안 나를 가장 곤란하게 한 것도 거미줄이었다. 나무줄기마다 촘촘히 커튼을 친 거미줄을 내 손으로 치워내며 귤을 따야 했으니, 그날은 가장 많은 거미줄을 만져본 날로 기억될 것이다.

그런 내가 살다 살다 내가 거미에게 반하는 날이 올 줄이야... 미술사 강연을 듣다가 <마망>과 루이스 부르주아의 이야기에 홀딱 빠져 버렸다.

높이 9미터, 지름 10미터, 8개의 기다란 다리, 배에는 대리석으로 된 알을 품고 있는 커다란 금속 거미. 루이스 부르주아는 이 작품에 <마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망’, 프랑스어로 ‘엄마’라는 뜻이다. 부르주아에게 거미는 자신의 엄마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태피스트리 복원 공방을 했던 어머니는 언제나 실과 바늘로 닳고 해진 천을 고치고 있었고 그 모습이 마치 거미 같았다고 회상하였다.

나는 항상 바늘의 매력과
마술적 힘에 끌려 있었다.
바늘은 손상을 치유하는 데 쓰인다. 그것은 관대하다.
결코 호전적이지 않다.
그것은 핀이 아니다.
- 루이스 부르주아 인터뷰 내용 中


또한 부르주아는 거미와 엄마의 강인함과 모성에 주목했다. 누군가 집을 망가뜨려도 다시 집을 짓는 거미, 새끼를 소중히 여기고 부화할 때까지 알을 품고 다니며 알에서 부화한 새끼들의 먹이로 자신의 몸을 내어주는 거미와 아버지의 불륜으로 망가진 집을 다시 고치려 노력한 어머니의 모습이 서로 맞닿아 있음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준다.


실제로 거대한 청동 거미 아래로 들어가면 관객은 자신을 품어주는 듯한 공간을 만나고, 그 속에서 거미, 혹은 마망이 지키고자 했던 사랑과 연민을 느낄 수 있다고들 한다.


거미와 마망, 여성, 손상의 치유, 마술적 힘, 복원... 이런 이미지들이 씨실과 날실로 이어지다 그림책 <소피의 달빛 담요>가 걸려들었다.


<소피의 달빛 담요>에 나오는 ‘소피’는 엄마와 친구들의 찬사와 사랑을 받는 예술가 거미이다. 혼자 살 나이가 된 소피는 비이크맨 씨의 하숙집으로 들어간다. 낡은 커튼 대신 현관에 달 커튼을 짜다 주인아주머니가 휘두르는 걸레에 도망쳐 다락으로 간다. 다락에 사는 선장 아저씨의 새 옷을 짜다 선장의 비명에 이번에는 지붕으로 기어 올라간다. 그러나 거기서도 요리사의 슬리퍼를 짜려다 내동댕이쳐진다.


이제 소피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 3층, 가난한 여인이 사는 집으로 가게 되고 이때쯤 되자 거미의 세계에서는 꽤 많은 시간이 흘러 할머니 거미가 되어 있다. 다행히 이곳에 사는 젊은 여인은 소피를 발견하고도 그저 미소만 지을 뿐 걸레를 휘두르지도, 욕을 하지도 않는다. 갓 태어난 아기를 위해 담요를 짤 실도, 돈도 없는 이 여인을 위해 소피는 담요를 짜기로 결심한다.


저 달빛으로 아기 담요를 짜야겠군.
물론 별빛도 조금 섞어서 말야.
(중략)

향기로운 솔잎 이슬 조각.......
밤의 도깨비불......
옛날에 듣던 자장가......
장난스러운 눈송이.......
(중략)

막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을 때
소피는 담요의 마지막 귀퉁이를 짜고 있었어요.
그 마지막 귀퉁이에 바로 자신의 가슴을 넣고 있었지요.
- 그림책 <소피의 달빛 담요> 중


가슴에서 뽑아낸 실로 끈끈한 줄을 만들어 내고, 끊기면 다시, 끊기면 또다시, 또 끊겼다면 또다시 집을 짓는 모습이 주위를 돌보고, 가정에서, 그리고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노동을 해 내고 있는 여성들의 생산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자꾸 거미에게로 향한다.

“맥락과 연결” 요즘 내 머리를 흔드는 키워드들이다.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어떤 맥락에 처해 있는지 상황을 살피는 깊이 있는 시선, 어떤 연결이 올바른가, 연결이 끊겨 소외된 자들에 대한 촘촘한 관계망이 궁금하다. 인간과 지구타자들 간의 얽힘과 상호 관계성, 서로 돌봄에 대한 나의 인식이 이렇게 거미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라크네가 신과의 대결에서 보여준 자신만만함, 신들의 부정과 만행을 비웃어주는 배짱도 가지고 싶고, 소피처럼 자신이 가진 재능을 베풀 줄 아는 따스함도 내 것이었음 좋겠다.


나도 거미줄 같은 촘촘하고 끈끈한 다정함으로 세상 좀 구해볼까? 스파이더 우먼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