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핑!>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 그림책 <핑!>의 캐릭터로 키링을 만들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인 우리는 모두 침침한 눈을 부릅뜨고, 돋보기를 추켜 올리며 바느질을 해 나갔다. 얼마만의 바느질인가? 고등학교 가사 시간에 버선 만들기 이후 이런 고난도의 바느질은 처음이라며 엄살들을 피웠지만 바느질만큼은 촘촘하고 가지런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핑’만 할 수 있어요.
처음 이 그림책을 읽었을 때 어땠더라? 아~ 핑퐁 게임, 탁구를 말하는구나. 근데 나는 ‘핑’만 할 수 있다고? 받아칠 생각 따위 하지 말고 계속 공을 던지기만 하라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이었던 듯하다.
그림책을 다 읽고 표지를 덮으면서는 관계에서 내가 힘들었던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눈시울을 핑~ 돌게 했다. 너에게 최선을 다한다 생각하지만, 나의 그 최선의 뒷면에는 너도 그만큼의 응답을 해 주어야 한다는, 그게 도리라는 생각이 언제나 장착되어 있었다.
하지만 거의 언제나, 돌아오는 응답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느렸고, 내 기대보다 작았다. 화가 났고 관계에 회의가 왔고 결국 나 스스로 자존감이 바닥을 기는 악순환이 계속되었지만 그건 너의 문제라 생각했었다. 단 한 번도 최선을 다했을 뿐인 나에게 문제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핑이 환한 웃음이어도
‘퐁’은 다를 수 있어요.
미소일 수도 있지만,
두려움, 언짢음,
무반응일 수도 있어요!
(중략)
‘퐁’은 친구의 몫이니까요.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는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나는 언제나 기대했다. 나의 '핑'에 사랑과 인정, 칭찬이 담긴 '퐁'이 즉각적으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그런 기대가 동기가 되어 행동을 정해 왔던 거다. '퐁'은 전적으로 친구, 남편, 자식의 몫이었는데 , 내가 생각한 속도와 모양대로 돌아오지 않는 모든 퐁들에 좌절했다.
기쁨에 찬 자발적 행동이라고 나 스스로 최면을 걸고, 친절과 위선의 가면을 쓰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핑을 해 온 나는 얼마나 관계에 충실해 왔던 걸까?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은 있었던 게 맞나?
며칠 전, 휴직 중인 초등학교 선생님이 자신이 사랑하는 그링책으로 <핑!>을 들고 오셨다. 선생님이 이 책을 처음 만난 건 코로나로 학교가 등교 수업과 비대면 수업을 번갈아 하던 2020년 7월.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된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아이들이 서로를 알아갈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서로 친해지고 싶고 같이 놀고도 싶지만, 아직은 낯설고 서먹서먹한 시기, 아이들은 자기 생각처럼 반응해 주지 않는 친구에게 실망하고 울먹였다. 그때 선생님이 하신 조언의 방법이 그림책 <핑!>이었다고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내가 가진 자유와 다정함과 열정으로 꾸준히, 착하게, 침착하게 ‘핑’하는 일일 뿐이라고. 친구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그건 친구의 자유이고, 몫이니 기다려보라고.
온 마음으로 '핑'을 했다면
숨을 크게 쉬고,
열린 마음으로 기다려요.
그 반 아이들은 좋은 선생님을 만났네. 최선을 다한 핑만이 나의 몫이라는 것, 어떤 퐁이 올 지는 마음을 가다듬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 ‘퐁’이 무엇이든 다 의미가 있다는 걸 말해주는 선생님. 매년 새학기마다 아이들에게 얼마나 자주 읽어 주셨던 건지 그림책 표지에 묻은 시간의 흔적들이 귀하게 느껴졌다.
상대에게서 오는 퐁은 내가 기대하지 않은 것일 때가 많다. 배울 것이 있거나 생각할 것이 있거나 고마운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제는 놓아야 할 것이 있을 수도 있다고 그림책은 말한다. ‘놓아야 할 것’, 이 구절에 머문다. 마냥 착하고 용감하고 다정한 핑을 계속 던지기만 하라는 게 아니라서, 날아오는 퐁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될 때는 놓을 수도 있어야 한다 말해 주어서.
퐁이 핑의 마음을 몰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핑을 함부로 대하는 퐁이라면 놓아 버리는 게 맞다. 그런 마음으로 얼마 전 이별을 택한 나로서는 위로가 되는 구절이다. 끝내 관계를 끊어버린 나를 그만 자책하고, 다시 나는 다음의 ‘핑’을 고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