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미나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어머니는 길에서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이 애가 내 딸이에요. 나를 미워해요.’라고 말하곤 했다.”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은 어머니와의 복잡하고 끈질긴 관계를 적절한 거리의 시선에서 잘 그려낸 회고록이다.
“엄마는 내가 하는 거의 모든 일을 비판했고, 나는 엄마의 사랑에는 조건이 따른다는 걸 아주 일찍 배웠다.” 이번 설 연휴에 읽은 <H마트에서 울다>는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가 엄마의 죽음 후 한국 음식과 한국 문화를 추억하며 어머니와 화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에세이였다.
“우리는 마지막 그 날들 내내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녀와 깊이 떨어져 있었다.” 다음 독서 모임을 위해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은 어머니의 죽음과 그 과정을 솔직하고 철학적으로 들여다본 책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세상 모든 딸들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이기에, 이렇게나 미워하고 절망하며 또한 그리워하는 것일까? 언제면 나는 그녀들처럼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나와 엄마의 얘기를 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미움>에 대해 써 보기로 한 날, 그 감정을 달래지 못하고 저녁을 먹은 후 산책을 나갔다. 겨울바람은 꽤 사나웠고, 파도는 득달같이 육지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 좀 봐달라고 조르는 아이처럼 계속 와서 치근대는 파도에도 바위는 끄떡없다. 나의 엄마처럼.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나고 자란 땅에서 박힌 돌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엄마와 한 번도 물리적, 정서적 거리를 둔 적이 없다는 말이다. 가고 싶어도 못 간다거나,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일이 없다. 얄궂게도 가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은 데 가야 하고 봐야 할 일이 꼬박꼬박 생긴다는 것이며 심지어 그런 일이 차고 넘치게 많다는 말이다.
저 골목에서 나는 아빠의 죽음을 알게 되었지.
저 집 이층에 살 때, 나는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힘이 들었지.
해안이라 다들 좋다 아름답다 말하지만 내게는 어릴 때의 아픔도 달팽이집처럼 업고 살아가는 거라 이 길들이 항상 푸근하고 달달하지만은 않다. 기분 좋은 날은 모두 은총이고 행복의 오브제이지만, 엄마에 대한 미움이 솟아날 때는 골목골목이 모두 어릴 적 아픔들을 호출하는 장치들이다.
바깥에는 어린 내가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운 현실이 있었고, 나에는 현실을 바꿀 힘이 없었다.
책을 읽고 상상하고 이해하는 것은
그런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하미나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중
집에 들어오자마자 중2 딸아이가 자기 방에서 나오며 두 팔을 벌린다. 이제 키가 똑같아진 아이와 나는 서로 껴안으며 잘 지냈는지 하루의 안부를 나눈다. 나는 엄마가 돌아오는 저녁 어스름이 되면 긴장했었지. 지친 엄마는 언제나 신경질적이었어. 집안이 흐트러져 있어서 설거지가 안돼 있어서 야단맞는 일이 없도록 여기저기 살펴야 했지. 엄마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루 종일 마음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입 밖으로 꺼내보지도 못하고 나는 하루하루 말없는 소녀가 되어갔지.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데 아이가 엄마 나 좀 봐하더니 춤을 춘다. 어찌 된 게 갈수록 아저씨 춤이 되어 가냐며 나는 깔깔 웃는다. 이제 안방으로 들어가 아빠에게 또 춤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엄마에게 재롱이란 걸 부려본 적이 없어. 두 살, 네 살, 여섯 살 터울의 여동생들, 열 살이나 차이 나는 남동생을 둔 집안의 첫째 딸. 한참 빨아야 할 엄마 젖을 동생에게 물려주고 엄마가 내게 물린 건 큰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 맏이가 잘해야 동생들이 잘 된다는 책임감이었지. 맏이는 재롱으로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야. 책임을 다했을 때 사랑받는 존재지. 그놈의 사랑이 뭔지 그게 대체 어떤 맛인지도 모르는 채 나는 사랑에 안달 난 소녀로 자랐지.
국화 언니가 딸 자랑을 오지게 한 날, 집에 돌아와 그 딸과 동갑인 큰딸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나에게 묻는다. 엄마는 왜 내 자랑을 안 해? 글쎄 왜지? 자식 자랑 하면 동티 날까 무서워라고 대답한다. 엄마는 나를 칭찬한 적이 없었어. 우등상도 나의 빛나는 성적표도 그대로 묻혔지. 아니 그대로 묻힌 건 아닌 것 같아. 동네에서 교회에서 친척들 사이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로 소문난 걸 보면. 그 자랑과 칭찬을 재주 부린 곰인 나만 받아본 적 없는 거지, 그때는 대입 학력고사 발표를 대학 운동장 벽에 대자보로 붙여 두었거든. 온 식구가 그걸 본다고 버스 타고 대학교까지 간 날, 벽보에 쓰인 내 이름을 보고 붙을 줄 알았져 이 한 마디가, 엄마의 나에 대한 유일한 인정이었어.
친구 해인이 오랜만에 제주에 왔다. 오랜만에 우리는 완전체가 되었다. 40년 가까이 같이해 온 우리는 밤새 이야기를 나눈다. 빠지지 않고 우리의 가난했던 그래서 비참했던 시절도 등장한다. 해인은 요즘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딸들에게는 그 비참함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경제 상황을 밝히지 않는다고 한다. 엄마는 남편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무시당한다 생각하고 자기 연민에 빠질 때마다 나는 원죄의식을 느끼는 작은 인간일 수밖에 없었어. 그녀를 육신의 고통에, 외로움의 구덩이에 빠뜨린 게 우리 남매들이라는, 나라는 인식. 그래서 나는 나의 자존에 대한 고민 이전에 죄의식을 먼저 느끼는 인간형으로 커나갈 수밖에 없었던 거 같아.
- 내가 이렇게 아픈 건 엄마 때문이야.
몇 년 전 큰딸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 순간 장검으로 스윽 베인 듯 선연하게 선득하게 가슴이 아팠다. 그때 나는 딸에게 말은 안 했지만 여느 드라마에 나오는 엄마들처럼 내가 어떤 정성으로 너를 키웠는데라고 답하고 싶었다. 아이 하나에만 사랑을 흠뻑 쏟고 싶어 기나긴 시간 동안 외동으로 키웠는데 이런 말로 나를 상처 줄 줄 몰랐다. 나도 그랬겠지. 아니 그랬지. 엄마는 우리를 위해 희생한다 말하며 당신의 고단함과 외로움을 호소했어. 거기다 대고 나는 이럴 거면 나가서 재혼하고 살라고. 우린 우리끼리 알아서 살겠다고 엄마를 향해 소리 지른 적도 있었지.
엄마가 또 병원에 입원했다. 매년 두세 차례 병원에 입원하는 엄마. 설 세배를 드리러 병원으로 갔다. 늙어가는 엄마를 아직도 미워하는 나는 또 죄책감에 빠진다. 젊은 날의 고생이 고스란히 몸에 남아 병들고 늙은 엄마에 대한 연민이 나의 한 팔 저울에 놓인다. 미워하고 억울했던 마음들이 또 다른 저울에 놓였다. 나는 이제껏 살아온 것처럼 계속 양팔 저울 사이에서 기우뚱거리며 울상을 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