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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세이읽는남자 Dec 01. 2022

지나간 일은 삭제

빨간 지렁이가 기어간다. 저 멀리 뒤에서 파란 지렁이가 천천히 따라온다.


“빨리 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늦어?”


“……”


“뭐야, 대꾸가 없어”


꾸물거리는 파란 지렁이를 잠시 쳐다보던 빨간 지렁이가 파란 지렁이 곁으로 기어간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멈춰 선 파란 지렁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 표정이 모든 것인데”


“……”


“말해봐, 왜 그래”


“사실은 말이야. 그저께 비 오는 날 친구가 땅 위로 올라갔다가 객사했거든. 그런데 내가 그 녀석한테 모질게 했던 게 자꾸 마음에 걸려서…”


“걸려서”


“자꾸 생각이 나네”


“생각이 나는데”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그 친구가?”


“아니, 모질게 했던 내 모습이”


“후회돼?”


“응”


“별 수 없잖아. 이제 와서”


“그렇긴 하지만…”


“과거잖아. 시간을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그러면 삭제해”


“자꾸 생각이 나니까 이러는 거잖아”


“그냥 생각을 하지 마. 다른 생각해”


“그게 말처럼 쉬우면 내가 이러겠냐고”


“노력을 해야지. 야한 생각을 하던가”


“나 지금 장난칠 기분 아니야”


“파랑아 지금 우리 갈길이 구만리야. 과거 따위에 발목 잡혀서 언제 다 갈래. 생각을 자꾸 곱씹지 말고. 다른 생각해. 방법이 없어. 삭제. 지워. 다른 생각해. 자꾸 떠올라? 떠오를 때마다 지워. 계속 지워. 그 방법뿐이야”


“……”


“빨리 가자. 나 배고파”


그렇다. 지난 간 일은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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