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라는 이름의 편견
시간을 엄격하게 지켰다는 칸트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유명한 칸트'의 일화일 뿐이다.
칸트가 유명하기 때문에 그 일화가 대단해 보이는 것이지, 일화가 유명해서 칸트가 훌륭해진 것은 아니다. 만약 그가 일반인이었다면 칸트는 그저 지독한 강박증 환자일 뿐이다.
칸트는 훌륭하다. 아니, 유명하다. 사람이 훌륭하다는 것은 주변 사람 95%의 인정과 본인만이 아는 5%의 비밀로 결정되는 것 같다. 나는 칸트만큼 시간을 잘 지킬 수는 있다. 하지만 칸트처럼 유명한 업적을 남길 자신은 없다.
나는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할 때가 많다. 만화 <톰과 제리>를 볼 때가 그랬다. 또래 친구들이 깔깔대며 즐겁게 볼 때, 나는 그 만화를 다큐멘터리로 보며 화가 나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당시 우리 집은 고양이를 키웠다. 지금처럼 반려동물이 아니라 철저히 '영업용'이었다. 구멍가게를 하다 보니 쥐로부터 식품을 보호하기 위해 고양이를 묶어 키운 것이다.
쥐의 천적이 사실은 고양이가 아니라 뱀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렇다고 뱀을 끈에 묶어 키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영업용이라 해도 내게 고양이는 유일한 장난감이요 친구였다. 엄마는 좁은 방에 털 날리는 것을 싫어하셨지만, 나는 실에 멸치를 묶어 던져주며 고양이가 그것을 낚아채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고양이가 두 발로 서는 것도 재미있었고, 요즘 유행하는 '사냥 놀이'를 나는 배우지도 않고 반백 년 전에 이미 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내 애착이 담긴 소중한 친구였다.
하지만 우리 집 고양이들은 오래 살지 못했다. 가게의 오징어를 몰래 먹고 토하다 죽거나, 풀어놓으면 밖으로 나갔다가 차에 치여 죽곤 했다.
그래서 묶어놓고 키웠더니, 이번에는 고양이가 자유로운 쥐들에게 농락을 당했다. 고양이가 묶인 채 진열대 위를 지나가는 쥐를 보며 약이 올라 들썩이다가, 쥐가 건드린 소주병이 떨어져 머리에 맞고 시름시름 앓다 죽은 일화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코미디 같은 이야기지만, 그때의 나는 내 편의 죽음 앞에 슬프고 화가 났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해서일까, 신기하게도 사람의 죽음처럼 절망적으로 슬퍼했던 기억은 없다.
나의 숨은 비정함 때문이었을까? 그래서 내가 고양이를 '영업용'이나 '장난감'으로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양이가 내 편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우리 동네는 쥐가 너무 많았다. 밤마다 천장에서 쥐가 지나다니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그 소리가 싫어 천장을 빗자루로 때리는 사람, 바늘에 실을 매달아 천장에 꽂아두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쥐가 천장위를 달리다 바늘을 밟아 비명을 지른다고 했다. 주인이 없는 사이 쥐들이 이불 위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밥을 먹는데 밥상 위로 쥐가 툭 떨어지는 일도 예사였다. 그러다 영화 <지옥의 카니발>을 보게 되었다.
월남전 용사가 잠을 자는데 커다란 쥐가 침상 위로 올라와 입안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다 깨는 장면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천장에서 쥐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제발 입안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입을 꽉 틀어막고 자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하늘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비가 새는 셋방이었지만 그곳이 유일하게 안전한 줄 알았는데, 비가 오던 날 천장에서 진득한 흙 같은 것이 떨어졌다. "엄니, 하늘이 무너져요"라고 외치기도 전에 정말 천장이 주저앉았다.
평소 느릿하던 내가 잠옷 바람으로 순식간에 가게로 뛰쳐나갔다. 사람은 위기 앞에 초능력을 발휘하는 모양이다. 내가 안전한 세계라고 믿었던 천장 위는 사실 빈 공간이었다. 기와 밑에 나무 합판도 없이 막대기 몇 개를 그물망처럼 엮어놓고 도배를 한 허술한 구조였다.
홍수가 심해 인부가 부족했던 탓에 매형의 도움을 받아 도배지 대신 비닐을 압정으로 고정했다. 비는 피했지만, 그때부터 청각을 자극하던 쥐의 소리가 시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비닐 위로 쥐 가족들이 왜 그리 뛰는지, 뛰다가 미끄러지는 실루엣이 생생하게 보였다.
게다가 우리 골목엔 터줏대감 같은 개들이 왜 그리 많았는지. 강아지가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 마리가 울면 온 동네 개가 짖었고, 골목을 걸으면 개가 꼭 따라왔다.
뛰면 안 된다고 해서 천천히 걸으면 천천히 따라오고, 빨리 뛰면 날아서 나를 물었다. 개에 물리면 주인 할머니가 그 집 개털을 뽑아 불에 태워 물린 자리에 붙여주던 기억이 난다. 나는 며칠간 광견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다.
그래서 내게 고양이는 내 편, 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톰과 제리>에서 영악한 제리가 우직한 톰을 물리치는 장면을 보면 스트레스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내가 정의로운 사상으로 무장해서 도둑인 제리를 미워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걷고 생각하다 보니 그것은 내 고정관념이었고, 친숙함에서 온 편견이었다.
고양이가 내 친구였기에 톰의 입장에만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다. 거기에 제목에도 안 나오는 조연 '스파이크'까지 튀어나와 톰을 괴롭힐 때면, 나는 미련 없이 채널을 돌려버렸다.
결국 칸트를 바라보는 나의 삐딱한 시선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타인들이 보는 눈이 편견인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저 나는 내 편인 것들에게만 관대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