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라무슈

감춰진 성역

by 폴킴

샬럿에게 벼랑 끝 승부였던 콩쿠르 결승. 그녀는 패했다.


​객석의 박수 소리가 극장에 소용돌이쳤다.


​마르첼로가 그녀에게 다가섰다. 볼에 키스하는 척했다. ​그는 샬럿의 귀에 경멸이 담긴 속삭임을 흘려 넣었다.


"샬럿, 여기서 끝내! 복수심으로는 나를 이길 수 없어!"


​샬럿은 억지웃음으로 응수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


​숨 막히는 고음이 터져 나왔을 때, 샬럿은 알았다. 객석의 공기가 질식하듯 멈췄음을.
​최고음이 이어지는 동안, 무대 위에서도 몇몇 관객이 가슴을 부여잡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단순한 감동이 아니었다. 생명에 대한 위협이라 하면 과장된 표현일까.


​반면, 마르첼로가 노래할 때 관객들은 차분해 보였다.


​그의 곡은 오페라 리골레토 중 <코르티 쟈니>.
​호색가 두카 공작에게 딸을 빼앗긴, 꼽추 아버지의 간절한 호소. 그것이 포르티시모로 절규하며 마무리됐다.

​거장다운 연주였다.
​관객들이 미동조차 없었던 이유. 슬픔을 절제할 틈도 없이 눈물이 흘렀기 때문이다.


​그의 마지막 소절이 끝났다. 감동 호르몬 측정기의 점수는 무려 980점을 찍었다.
​샬럿의 950점을 여유 있게 따돌린 성적이었다.


​둘은 대기실 복도로 향했다.
​샬럿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당신의 싸구려 표현력이 얼마나 하찮은 지, 언젠가는 모두가 알게 될 거예요!"


​독설을 내뱉은 후, 그녀는 스스로 놀란 듯 입술을 깨물었다.


​애써 다시 냉정함을 끌어올려 말했다.


​"좋아요. 인정하죠. 당신은 오늘 이겼고, 위대하신 성악가 마르첼로의 목소리는 신이 주셨어요."
​"하지만 그 영혼은 가짜죠."
"마치 두카 공작이 거짓 사랑고백으로 리골레토의 딸을 놀잇감 삼았듯이."
​"당신은 가짜 감동으로 관객들을 속이고 있어요."


​마르첼로가 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가짜라..."
​"그럼, 진짜 감동이 뭔지 설명해 줄래?"
​"오로지 복수심에만 불타 만들어 내는 너의 목소리에는 어떤 고결함이 담겨있는 거지?"
​"샬럿, 아직도 모르겠니? 너는 내 제자이어야만 빛을 낼 수 있어."


"너 자신을 돌아봐! 뾰족하기만 한 너의 목소리는 마치 버려진 얼음 궁전 처마 밑 고드름 같아."
​"너는 그저 기술 전문학교에서 교육받은 음악 기술자에 불과해. 아님 고음 제조기?!"


​마르첼로는 무대 위의 인자한 표정이 온데간데없었다. 숨겨 온 감정을 쏘아보는 눈빛으로 드러냈다.
​위선으로 꽉 찬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 경멸이 서려 있었다.


​그 역시 샬럿에 대한 배신감에 이를 갈고 있었던 모양이다.


​샬럿은 눈물샘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태연한 척, '소프라노 샬럿 로씨'라고 붙어 있는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거울을 봤다. 소리를 참으며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울기 시작했다.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그녀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소프라노였다.


​마르첼로는 이미 세계적 거장. 국제 콩쿠르의 단골 심사위원장이었다.


​샬럿은 마르첼로가 심사하는 모든 콩쿠르에서 우승을 독식했다. 심지어 그가 없는 자리에서도 그의 입김이 그녀를 최고로 만들었다.


​샬럿은 자신이 누리는 이 특혜를 모른 척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꺼이 즐기며 누렸다.


​마르첼로도 지금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하다.
​"세계 성악계의 대부"라는 칭호를 받던 자신.
​제로베이스에서 풋내기들과 함께 경쟁해야 하는 이 시스템을 속으로 경멸하고 있다.


​어떤 미친 인간이 자신이 만든 성역을 깨 부수고 있는지 생각만 하면 분노가 차오른다.

​이 감동 호르몬 측정 심사 시스템.
​그것은 샬럿의 기자회견이 도화선이 되었다.
​커튼 뒤에 숨어 있는 대회 주관자와 샬럿은 무슨 사이일까?


​마르첼로가 굳이 이 대회에서 직접 경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