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녀씨의 오사카 여행기
남편은 일본 오사카 가족여행을 준비하며 한 달 전 엄마에게 통 큰 선물을 했다.
"어머니, 일본 가면 많이 걸어야 하니까 이거(통녹용사슴진액) 한포씩 꼭 챙겨 드세요. "
엄마는 돈도 없는데 이런 걸 왜 샀냐고 말은 하면서도 웃음을 감추지는 못했다. 일본에서 많이 걸을 것을 대비해 체력을 조금이라도 보강해주고 싶다는 남편의 선물은 어쩌면 지금 엄마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지도 못한 섬세한 배려가 고마웠다.
남편과 나는 20년 전 친정 집 근처에 신혼집을 마련했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다 보니 장모와 사위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도, 오해도 사그라진 지 오래. 남편은 당연하다는 듯 엄마의 항공권도 예매했다.
'설날 연휴기간 200만 명 넘는 이용객이 인천국제공항을 이용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예상대로 인천공항은 새벽부터 많은 인파로 넘쳐났다.
"이 사람들은 다 어디를 간다니? 경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말만 그런 것 같다. 이럴 땐 집에 있어야…. 그런데 여권은 잘 챙겼어?"
"엄마, 쫌!"
엄마의 잔소리와 함께 가족 여행이 시작되었다.
중간중간 여행 일정을 여러 번 수정했음에도 70대 할머니가 초등학교 5학년, 고등학교 1학년 아이들의 에너지를 따라 잡기엔 역시나 무리인 듯했다. 3대가 함께 하는 여행은 서로 다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남편은 힘들어 보이는 엄마가 신경 쓰였는지, 다음날 예정되어 있던 버스투어를 취소했다.
"어머니, 내일은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브런치 먹을까요? 제가 오기 전에 좋은 곳 하나 찾아놨어요."
남편은 덩치만큼이나 마음이 큰 사람이었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늦은 아침. 덴가차야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니 오래된 여관을 개조해서 만들었다는 카페가 보였다. 작고 아담한 곳. 나무 테이블은 방문객들의 손을 타 반질반질하게 닳았고, 오래된 나무바닥과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나무 의자는 정겨웠다.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는 것도 좋았다.
주인 할머니가 영어로 된 메뉴판을 내밀자 엄마가 먼저 메뉴판을 받아 들었다.
“내가 한번 시켜볼까?”
"어? 그럴래?"
여행 내내 딸에게 주문을 맡기던 엄마는 메뉴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주인 할머니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에그샌드위치 앤드 커피”
'오! 매일 공부를 한다더니, 영어를 일본에서 써먹을 줄이야!' 발음이 유창하진 않았지만, 주인은 알아 들었고, 엄마는 만족했고, 사위는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배우니까 이제 영어가 좀 보인다."
분위기가 좋았는지, 엄마의 기분 탓이었는지 알 순 없지만 엄마는 음식이 맛있다고 했고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을 기분 좋고 편안하게 즐겼다. 엄마는 이후에도 영어로 쓰인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읽으며 자신감을 더해갔다. 계속되는 영어 공부에 손주들은 피곤했겠지만 할머니의 노력이 큰 본보기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종녀씨, 우리 다음엔 어디로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