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북한군의 묘지 앞에서

적의 이름으로 묻힌 이들을 원망하고 싶지 않았다

by 한그루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 56.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파주를 자주 오가면서도 들어본 적 조차 없는 곳.

바로 '북한군 묘지'다.

이 묘지는 1996년도에 국방부에 의해 조성되었고, 한국전쟁 이후 발굴한 유해와 무장공비의 유해 800여구가 묻혀 있다고 했다.


조용히 묘역 안으로 들어가 묘석을 살펴보았다.

'북한군 79구' 인원수가 표시된 묘석도 보이고, 이름과 날짜, 전사 장소가 표기되어 있는 묘석도 보이지만 대부분은 '무명인'이라 적혀있다.


적군의 유해를 안장한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


우리가 적군의 묘를 관리하는 이유는 사망한 적군이라도 매장해 분묘로 존중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고 인도주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은 북한에서 유해 송환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를 갖춰 북한군의 묘는 고향땅을 볼 수 있는 북향 쓰고 있다니 씁쓸했다.

* 제네바 협약(국어사전)
1949년 제네바에서 채택된 네 가지 조약. 전투 지역에 있는 군대의 병상자의 상태 개선 조약, 해상에 있는 군대의 병상자 및 난선자의 상태 개선 조약, 포로 대우에 관한 조약, 전시에서의 민간인 보호 조약이다.


북한군의 유해를 어떻게 구분하냐는 질문에 관계자는 '군복 조각, 단추, 군번줄, 명찰, 군화 뒷굽 등'이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말해준다고 했다.

적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 총을 겨눴을 이들. 누군가의 귀한 아들이었고, 사랑하는 연인이었고, 미래를 꿈꾸던 청년들이었을 거라는 말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실향민이었던 나의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가 떠올랐다. 두 분은 갓 태어난 아빠를 등에 업고, 큰고모의 손을 잡고 평양에서 피난길에 올랐다고 했다. 어릴 때는 그저 '또 옛날이야기'라고만 흘려들었는데 멈출 수도 뒤돌아 볼 수도 없는 그 피난길이 얼마나 두렵고 막막했을까? 그 마음을 알아주기엔 난 너무 어렸다.


1983년,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한창일 때 TV앞에 앉아 눈물을 훔치던 할머니를 기억한다.

"할머니도 저기 나가 봐요."

어린 나의 말에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북한에도 없을 거야."

할머니는 피난길에 헤어졌다는 부모님과 언니를 다시 만나진 못했다. 그나마 부부와 자식이 무사히 내려왔으니 다행이라 여기셨던 것 같다.


할아버지 댁에 가면 명절에도 생일에도 가족들이 모여 이북 음식인 만두를 빚었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자식들에도 말할 수 없었던 그리움을 그 큼지막한 만두 속에 꾹꾹 담아두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북한군 묘지 앞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무기명의 이름으로 남한 땅에 묻혀 있는 이들에게 우리가 옳았고, 너희가 그르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또 그런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내 할아버지의 이웃이었고, 내 할머니의 친구였을지도 모르는... 어쩌면 지극히 평범하게 살았을 그들의 묘 앞에서 함께 간 이들과 조용히 성호를 그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