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기록합니다
고작 몇 번 끄덕여주었을 뿐인데 사춘기 아이의 표정이 누그러졌고, 고작 몇 시간 내어주었을 뿐인데 어색함이 고맙다는 인사가 되어 돌아왔다. 고작 잘 지내냐는 안부만 물었을 뿐인데 순창으로 귀촌한 세언엄마가 싱싱한 상추를 보내왔다.
고작이 쌓이고 쌓여 좋은 날이 되었다.
"할머니 우리 키 재볼까?"
둘째 아이의 말에 나의 엄마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내어주었다.
"내년이면 나보다 더 크겠다."
할머니만큼 키가 커서 신난 아이와 그 모습마저도 흐뭇한 나의 엄마.
난 매주 수요일 점심엔 특별한 약속을 잡지 않는다. 우습겠지만 올해 초 목표 중 하나를 '혼밥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정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더 나이가 들기 전에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걸 찾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난 혼밥의 입문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햄버거나 샌드위치 등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메뉴를 택했고, 그다음엔 라면과 김밥, 칼국수처럼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폭을 넓혀나갔다. 혼자 먹는 밥이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간 식당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드니 나도 모르게 정신없이 허겁지겁 먹어치우고 말았다.
전화로 남편에게 얘기했더니 "그냥 직원들이랑 먹어."라는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웃프다. 혼밥은 여전히 어렵다.
큰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서울로 이사했다. 서울에 마련한 첫 집은 40년이 넘어가는 노후된 아파트였지만 서울살이가 그리 좋을 수가 없었다. 여동생이 근처에 살아 매일 만날 수 있었고, 출퇴근 시간은 30분이나 단축되었으며, 안양천에서의 저녁 산책이 가능했다. 아래층에 사는 똘망이 엄마는 자기도 아들을 키우고 있으니 아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말라는 고마운 말로 나를 감동시켰다. 그래서 난 이 집이 더 편하고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 이 집은 부서진다.
이삿짐을 다 빼고 마지막을 사진으로 남기며 마음속으로 읇조렸다.
"잠시만, 안녕."
시어머니의 칠순을 앞두고, 난 며느리 모드에 돌입했다. 가족들끼리만 먹는 소박한 식사자리라고는 했지만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는 분주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횟집 단독홀을 예약하고 '꽃길만 걸어요. ***님의 칠순을 드립니다' 현수막과 케이크 토퍼를 준비했다. 쇼핑몰을 뒤져 쫘르륵 펼쳐지는 이벤트 돈봉투도 구입했다. 남편은 "우리 엄마는 이런 거 좋아하시지 않을걸?"이라고 했지만, 이 날 만큼은 특별한 날로 기억되길 바랐다.
'직장 생활하는 네가 시간이 있겠냐. 네가 살림만 하면 나보다 더 잘할 거다. 잘 먹어주면 내가 고맙지.'
시어머니는 생일상도 한 번 제대로 차려내지 못한 며느리에게 서운한 내색 한번 내비치지 않았다. 난 결혼하고 20년 동안 시어머니의 김치와 반찬을 얻어다 먹고 있다.
어설펐지만... 이벤트는 성공이다.
"어머니, 제 마음 아시죠?"
12월, 난 충분히 이기적이었다. 심장은 쿵쾅거렸지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다 내뱉었다.
"더는 못하겠어요."
정적이 흘렀고, 그는 놀랐고, 나는 후련했다.
결과적으로 나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상관없다. 나는 충분히 말했고, 상대는 충분히 들어주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