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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맑음 Sep 13. 2024

얼음 조각가의 섬

유맑음 동화 #1

 나는 얼음 섬에 사는 ‘메리’에요. 여기는 살결을 에는 추위도 바람도 없답니다. 얼음 조각가 ‘마스’ 할아버지와 지내고 있어요. 할아버지는 얼음 섬 한가운데서 얼음사탕을 만들고 계세요. 곧 있으면 손님들을 맞을 시간이거든요.


 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이 시간이 제일 싫어요. 유일한 말동무인 할아버지가 얼음을 조각하는 작업에만 집중하셔야 하니까요. 나 할아버지 손에서 만들어졌어요. 일손을 도우라고 만드신 거예요. 작업을 방해했다간 다시 얼음가루로 돌아가게 될지도 몰라요. 그래도 혼자 있는 시간은 외롭고 쓸쓸하다고요.


 뾰로통한 얼굴을 숨기고 평소처럼 손님들이 앉을 의자와 테이블을 정리했어요. 요즘 부쩍 손님이 늘어 의자를 얼마나 놓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어요.


 “흠,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게다.”


 할아버지가 얼음사탕 하나를 입 안에 탁 던져 넣으며 말했어요. 적막을 뚫고 나온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꽁꽁 얼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어요.


 “손님들이 어제보다 많이 올까요?”

 “앞으로 며칠은 아주 많이 찾아올 거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잖니.”


  할아버지 말씀대로 의자를 모두 꺼내어 삼삼오오 모여 앉을 수 있도록 놓았어요. 정리를 마치자마자 손님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얼음 섬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어떤 물건을 갖고 싶어서 오셨나요?”


 할아버지의 쩌렁쩌렁한 첫인사가 얼음 섬을 가득 메웠어요. 나는 얼음사탕 바구니를 들고, 아이 손님들 손에 사탕 한 알씩을 쥐어주었어요.


 “저는 아주 커다란 곰 인형을 갖고 싶어요! 엄마가 너무 큰 인형은 안 사주신대요.”

 “나는 킥보드요! 아빤 킥보드가 위험하다고 안 사줘요. 내 친구들은 다 타는데 말이에요.”

 “전 색연필이요! 우리 엄마아빠는 너무 바빠요! 색연필 얘기를 꺼낼 틈도 없다고요. 저만의 색연필을 만들어주세요.”


 구름 떼처럼 몰려든 아이 손님들은 설렘과 기대에 찬 얼굴들을 바짝 들이밀며 말했어요. 자신이 갖고 싶었던 물건과 저마다의 사연을 모조리 쏟아내듯 했지요. 정신없이 주문을 받다 보니 내 이마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어요.


 할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미소로 아이 손님들을 달랬어요.

 “손님 여러분, 천천히 말해도 괜찮아요. 얼음 조각품이 녹기 전까진 꿈에서 깨지 않을 테니까요.”

 할아버지의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아이 손님들은 차례를 지켜 차근차근 말하기 시작했어요.


 주문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쌓여갔지요. 할아버지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뚝딱뚝딱 얼음을 조각하셨어요.


 “자, 얼음으로 만든 커다란 곰 인형 나왔습니다. 맘껏 가지고 놀아요.”

 몸집만 한 곰 인형을 주문한 아이 손님은 완성된 조각품을 두 팔 벌려 꼭 끌어안았어요. 파자마 원피스를 나풀거리며 콧노래도 불렀지요. 아이 손님은 세상을 다 얻은 듯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었어요.


 킥보드, 색연필, 과자꾸러미, 로봇 등등……. 할아버지는 수많은 조각품을 만들었어요. 여전히 밀려있는 주문들을 위해 할아버지는 얼음 섬 한편에서 집채만 한 얼음덩이를 가져왔어요. 얼음섬 얼음덩이들은 아무리 커도 깃털처럼 가벼워요. 솜사탕같이 몽글한 얼음덩이가 신기했던 아이 손님들 눈을 반짝였어요. 할아버지는 얼음덩이를 탕탕 두들기며 속삭였어요.

 “이렇게 큰 얼음 조각이 생겨나다니, 모두들 내 조각품을 기다렸나 보군. 허허.”

 손님들의 소원이 간절할수록 우리 섬에는 얼음덩이가 크게 생겨요. 할아버지는 커다란 얼음덩이가 생겨나는 모습을 아주 좋아하셨지요.


 어느새 모든 조각품들이 완성되어 제 주인의 품을 찾아갔어요. 아이 손님들은 각자의 조각품을 가지고 실컷 뛰어놀았요.

 나는 기뻐하는 아이 손님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어요. 원했던 걸 갖는 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지요. 내 손에 쥐어본 거라곤 조각품을 만들고 남은 얼음가루뿐이니까요.

 “할아버지, 자투리 얼음가루들은 저쪽 얼음산에 묻어놓으면 되지요?”

 “메리, 이제 척하면 척이구나.”

 “잘 가르쳐주신 덕분이에요, 헤헤.”

 할아버지는 남은 얼음들을 결코 버리는 법이 없었어요. 얼음조각에는 아이 손님들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항상 말씀하셨지요. 아마도 그 조각들이 모여 얼음 섬이 만들어진 거라고, 나는 생각했어요.


 “곧 있으면 손님들의 조각품들이 녹기 시작하겠구나. 아주 중요한 순간이야.”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아이 손님들의 손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이내 조각품들이 형체를 잃고 녹아내렸어요.


 “할아버지, 조각품들이 다 녹으면 손님들은 꿈에서 깨어나지요?”

 “그렇단다. 이곳에서 갖고픈 걸 원 없이 가지고 놀았으니, 깨어나면 갖고 싶었던 마음이 어느 정도는 누그러질 거란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어요?”

 “저길 좀 보거라.”

 할아버지는 내게 별빛이 가득한, 얼음 섬 바깥을 내다보라며 한 곳을 가리켰어요. 그곳엔 아까 커다란 얼음 곰 인형을 받았던 아이와 아이의 어머니가 보였어요.


 “딸, 좋은 아침. 잘 잤니?”

 “네, 무척 기분 좋은 꿈을 꿨어요!”

 어머니가 무슨 꿈이었는지 묻자, 아이 손님은 고개를 까딱이며 골똘히 생각했어요.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었어요. 어머니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어요.

 “정말 기분 좋은 꿈이었나 보구나. 아침부터 커다란 곰 인형 사달라고 조르지도 않는 걸 보니 말이야. 다 컸네, 우리 딸.”

 아이 손님은 어머니의 칭찬에 빙글 웃어 보였어요.


 “할아버지, 이제 저 손님은 엄마한테 곰 인형 사달라고 떼쓰지 않을 것 같아요!”

 나는 잔뜩 신이 나서 말했어요.

 “그렇지? 얼음 섬에 왔다 간 아이 손님들은 저렇게 한 발짝 어른스러워진단다.”

 할아버지의 풍성한 수염 뒤에는 깊은 행복이 자리한 듯 보였어요. 할아버지는 떼쓰지 않는 아이를 좋아하시는 듯했지요.

 래서 난 할아버지께 하고 싶었던 말을 또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어요.

 ‘저친구가 갖고 싶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내 속을 모르시는 게 분명했어요. 아직도 곰 인형 손님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짓고 계셨으니까요. 할아버지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어요.

 “얼음 조각품은 녹아 사라지지만 손님들의 가슴속 어딘가에 남아 든든한 디딤돌이 되어준단다. 정말 경이롭지 않니?”


 크리스마스나 어린이날을 앞두고 있을 때면, 손님들이 유난히 더 많아지곤 했어요. 아이 손님들이 갖고 싶은 물건에 대해 평소보다 더 많이 생각하기 때문일 거라고 할아버지는 말씀하셨요.


 “오늘은 손님이 하나도 없네요. 지난번엔 꼭 이 섬이 꽉 찬 것처럼 많았는데 말이에요.”

 “외려 크리스마스 당일이라 그럴 게다. 얼음 섬에 오지 않는다는 건, 원하던 선물을 정말로 받게 되었거나 아니면…….”

 할아버지가 말을 잇지 못하고 화들짝 놀랐어요.


 할아버지의 시선을 따라보니 저 멀리서 찬찬히 걸어오는 한 사람이 보였어요. 바로 ‘어른’ 손님이었어요. 우리 얼음 섬에는 어른 손님이 찾아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간혹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손님이 찾아와 최신형 휴대폰을 주문하는 경우는 있었지만요.


 할아버지는 아이 손님을 반기던 목소리로 어른 손님을 맞이했어요.

 “얼음 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곳에선 얼음으로 갖고 싶은 물건을 조각해 드립니다. 어떤 물건을 갖고 싶어서 찾아오셨나요?”


 어른 손님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시간……. ‘시간’을 만들어주세요.”


 난생처음 들어보는 주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어른 손님이라면 집이나 차, 현금 이런 것들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시간’이라니요!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시간’을 원하시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는 희고 기다란 수염을 쓸어내리며 물으셨어요.

 “그건…. 저는 시간을 다시 보내고 싶거든요. 제 어릴 적 시간들이요. 전 모든 게 괜찮아야 하는 아이였어요. 엄마가 아파도 괜찮아, 아빠가 날 버리고 가도 괜찮아, 가난하다고 친구들이 놀려도 다 괜찮아…….”


 어른 손님의 말 한마디에 할아버지의 두 눈이 반짝 빛났어요.

 “아하! 손님은 얼음 섬에 단 한 번도 오신 적이 없군요.”

 어른 손님이 고개를 살짝 들어 할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어요. 할아버지는 다정한 얼굴로 말씀을 이어갔어요.


 “얼음 섬에 오지 않는 경우는 두 가지랍니다. 원하던 선물을 받게 되었거나, 원하는 것을 애써 모른 척 묻어두는 경우지요. 손님은 후자인 듯 보이는군요. 모든 게 괜찮아야 하는 아이가 아니라 마음껏 투정 부릴 줄 아는 아이의 ‘시간’을 갖고 싶은 것이지요?”

 “네……. 맞아요.”

 “그렇다면, 잠시 저 쪽에 앉아 기다려주세요. 메리, 너는 손님께 얼음사탕을 갖다 드리렴.”


 할아버지는 잠시 고민한 뒤 섬 저편에서 커다란 얼음덩이를 가져왔어요. 그러고는 얼음망치로 깡깡 소리를 내며 조각품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손님, 완성되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어른 손님에게 조각품을 건넸어요.

 “이게 무엇인가요?”

 “이건 우리 얼음 섬 모양을 본떠 만든 ‘작은 얼음 섬’입니다. 우리 얼음 섬은 아이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얼음 조각들로 이뤄져 있답니다. 그 속엔 투정 부리는 아이의 마음도 담겨있을 테지요. ‘작은 얼음 섬’이 녹기 전에 손님만의 ‘시간’을 마음껏 보내셨으면 좋겠네요.”


 어른 손님은 빈 테이블에 앉아 ‘작은 얼음 섬’을 바라보며 자신만의 시간 여행을 떠났어요. 조각품이 녹기 시작할 무렵, 어른 손님은 아이의 모습이 되어 있었지요. 어른 손님은 조각품이 사라지기 전에 할아버지께 인사를 전했어요.


 “최고의 선물을 주셔서 감사해요, 할아버지.”


 우리는 첫 어른 손님과 포근한 작별인사를 나누었어요.  마침내 모두 녹아내린 ‘작은 얼음 섬’은 물 자국을 촉촉이 남겨두었어요.


 “할아버지, 어른들에게도 얼음 조각품이 필요한가 봐요. 어른이 되면 투정 부리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몸이 컸다고 마음도 어른이 된 건 아닐 테니 말이야. 어른도 가끔은 아이 같은 투정이 필요하단다.”


 문득 할아버지가 떼쓰지 않는 어른스러운 아이만 좋아하시는 건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이참에 나도 투정을 부려볼까 싶었어요. 친구를 만들어달라고 말이에요! 그전에 내 옆에 쌓인 남은 얼음 조각들을 치우는 게 먼저겠지만요.


 “할아버지, 이번에 남은 얼음 조각도 얼음산에 묻어야겠죠?”

 “음, 그건 잠시 놔둬 보거라. 첫 어른 손님을 맞이한 기념으로…….”

 “기념으로요……?”

 할아버지가 내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었어요. 기념 조각품이라면 무언가 대단한 작품을 만드실 게 분명했어요. 나를 만드신 날도 첫아기 손님의 ‘젖병’ 주문을 받은 날이었거든요.


 “친구를 하나 더 만들자꾸나! 이름은…… 그래, ‘크리스’가 좋겠다. 허허.”

 세상에, 친구라니요! 할아버지가 제 마음을 읽으신 걸까요?

 할아버지는 남은 얼음 조각으로 금세 제 친구 ‘크리스’를 만들어주셨어요. 저처럼 사슴뿔을 달고 동그란 코를 가진 멋진 친구였지요. 저도 드디어 얼음 섬에 친구가 생긴 거예요! 세상을 다 얻으면 이런 기분일까요?


 저 메리와 크리스, 그리고 마스 할아버지는 언제나처럼 손님 맞을 준비를 시작할 거예요. 이제 할아버지가 얼음사탕 만드는 시간도 외롭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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