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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Nov 29. 2019

명절

내가 일하는 곳에서는 추석과 설날에 꼭 중요한 회의를 한다. 같은 곳에서 지금 9 년째 일을 하고 있는 나는 한국 명절에 쉬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그렇긴 하지만 미국 명절에 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오늘은 추수 감사절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다. 새벽에 일어나 멀리 있는 가족과 영상 통화를 하고 아점을 먹었다. 벌써 며칠째 먹고 있는 소꼬리 곰탕과 어제저녁에 먹다 남은 찜닭이 주 메뉴다.


귀가 얇은 나는 운동과 건강에 관심이 많은 어떤 사람이 추천해준 건강 보조 식품을 최근 구입해서 먹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총 열 종류의 약을 다 먹었더니 몸이 그 많은 화학물질을 분해하느라 너무 피곤했나 보다. 오후에 계획에 없던 낮잠을 세 시간 동안이나 잤다. 추수 감사절을 같이 보내자는 친구들의 제안도 다 정중히 거절하고, 직장 동료가 여는 파티도 패스하고, 거하게 차린 추수 감사절 뷔페도 마다하고, 그냥 모처럼의 휴가를 아무 생각 또는 계획 없이 자유롭게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낮잠 잔 시간이 조금도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른 저녁 나는 딸을 데리고 시내에 갔다. 딸의 머리를 먼저 자르고, 가까운 백화점 푸드코트에서 우리는 각각 스파게티와 쌀국수를 먹었다. 저녁을 먹고 지하상가에서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여러 개 사고, 만두와 도넛도 샀다. 과 가게에 들러서 과자와 사탕을 몇 개 샀다. 죽염 사탕이라고 먹어 보니  짜지도 달지도 않 묘한 맛이었다. 쇼핑을 마치고 지하철을 탄 시간은 하필 러시아워였다. 환승역이라 내리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사람들이 다 내리고 딸과 나는 인파에 밀려 지하철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선 곳은 손잡이도 옆에 없었고 사실 손잡이가 필요 없었다. 콩나물시루 속의 콩나물 마냥 사람들은 빼곡히 붙어 있었고, 이런 상황이 낯선 딸과 나는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피식 웃었다. 탄 곳에서 두 정거장을 간 후에 내려야 했는데 그때도 사람들에게 밀려 급하게 내렸다. 지하철역을 빠져나온 후에 전통 시장에서 떡과 도토리 묵을 샀다. 집에 도착하니 현관문 앞에 택배 상자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기쁜 맘으로 열어 보았더니, 몇 주 전에 주문했던 캐릭터 양말 꾸러미에 내가 주문한 것보다 양말이 켤레 적게 들어 있었다. 택배 상자들을 다 열어 본 후에 나는 늦은 시간에 산책을 하러 나갔다.


한참을 걸어 내가 매일 밤 가는 산책에 도착했다. 평소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끔 보았던 야외 에어로빅이 한창이었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서 처음으로 같이 해 보았다. 맘처럼 몸이 잘 따라 주지 않았지만 어쨌든 끝까지 해 보았다. 나름 재미있었다. 에어로빅을 마치고 무리 중에 한 사람이 강사에게 흰 봉투를 건넸다.  평소에 하던 대로 나는 산책로를 따라 계속 걸었다. 야시장이 열리는 데까지 갔더니 통기타 반주에 맞춰 옛날 노래가 들려왔다. 노래를 따라가서 앉았더니 가수는 곧이어 마지막 곡을 불렀다. 마지막 노래의 일절까지 듣고 무명가수 앞에 놓인 팁 통에 오천 원짜리 한 장을 넣어 주고 급히 발길을 옮겼을 때는 이미 밤 아홉 시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관습과 습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보낸 하루가 나름 만족스러웠다. 나다운 하루를 보낸 것이다. 가족이 모두 같이 보낼 수 있는 명절이면 더 좋았겠지만 내 맘대로 보낸 명절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칠면조나 햄을 그다지 즐기지도 않고 파이는 더더욱 먹고 싶지 않다. 명절에 다이어트를 할  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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