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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May 09. 2020

재택근무

직장에서 사는 삶

코로나 19 바이러스 창궐 이후 벌써 11주 동안 재택근무 중이다. 다음 주에도 재택근무 예정이다. 재택근무를 하다 보니 제일 힘든 점은 업무 시간 조절이다. 처음 한 달 정도는 하루 12시간에서 15 시간을 근무했다. 그리고 도저히 내 몸이 감당해내지 못하겠다는 판단을 내린 후에는 의식적으로 근무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래도 여전히 근무 시간 외의 시간을 내 시간로 활용하는 것은 힘든 과제로 남아 있다.


재택근무라 편한 점도 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치장을 하는 번거로움은 확연히 줄었다. 특히 회의가 많은 화요일과 금요일에는 약간의 치장을 해야 하긴 하지만, 화상 회의에서 보이는 부분은 주로 얼굴과 상반신의 반 정도이다 보니 옷에 관한 신경은 그다지 쓸 필요가 없다. 아침에 치장하는데 걸리는 시간 그리고 출퇴근 시간은 고스란히 업무시간 연장으로 귀결되었다. 정상 출근할 때는 (사실 그때도 칼퇴근하는 스타일은 못 되었지만)어느 정도 적당한 시간에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와서는  자신을 위한 시간에 충실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출퇴근 시간이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보니, 근무 시간은 칼처럼 지키고 근무 시간 외에도 일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 연장근무를 하는 철인 정신 노동자로 둔갑한 셈이다. 덕분에 5년 전에 최우수 근로자을 받은 이후 최근 특별 감사패를 받기는 했지만, 고객과 조직의 만족이 나 자신의 복지보다 우선되는지는 의문이다.


재택근무 11주째 마지막 날인 어제만 해도 그렇다. 근무 시작 30분 전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그전날 밤늦게까지 업무 처리를 한 이후에 들어온 다른 업무 처리를 하느라 한 시간 가량을 보냈다. 그리고 모든 고객에게 주간 보고서를 작성해서 보냈다. 이후에 두 시간가량 고객들과 화상 통화, 전화, 또는 이메일로 상담을 했다. 그러다 보니 점심시간이 끝난 이후에야 음식을 배달시켰다. 오후에는 전체 직원회의가 있었다. 화상으로 직원회의를 하면서, 배달 온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회의 주체자인 관리자에게서 일방적으로 조직의 업무 방침이나 새로 내려온 지시사항을 전달받았다. 간간 끼어들어 발언하는 간 큰 직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마이크와 카메라를 끈 채로 앉아서 조용히 듣다가 질문 사항 같은 것은 문자로 적었다. 나도 그랬다. 회의 시간은 정해진 시간보다 길어져서 그다음 일정에 약간의 지장이 생겼다. 전체 직원회의를 마치고 고객 상담 이메일에 답한다고 한 5분가량 늦게 직원 교육에 참여했다. 교육 담당자와, 직원 교육부서 관련 직원  두 명을 제외 유일한 피교육자였다. 내가 너무 원칙주의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강요받지 않으면 뭐든 하지 않는 대부분의 직원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직원 교육까지 받고 나니 정해진 업무시간은 끝이 났다.


그래도 나의 하루 일정이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고객 상담과 서류 업무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 먼저 고객 상담을 했다. 고객신뢰를 쌓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서류 업무를 했다. 다음 주 주간 계획서를 작성하고, 주간 계획과 연관된 부자료 들을 공유 파일로 준비해서 업로드를 했다. 이후 고객들에게 마지막으로 다음 주를 준비하는 인사장을 만들어 이메일로 전송했다. 모든 일을 끝내고 컴퓨터에서 손을  시간은 근무 시작한 지 13시간 이후다. 한 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휴회 중에 눈치껏 화장실도 다녀와야 하고, 퇴근 후 산책 시간도 없는 재택근무다. 하루 평균 10시간을 일하고 종종 주말도 반납하는 가련한 정신 노동자. 컴퓨터 화면은 끈 후에도 휴대폰으로 고객 상담 이메일은 쉴 새 없이 들어다. 하지만 더 이상 근무를 할 수가 없다. 내 두뇌는 이미 정보 초과 상태이고 내 몸도 더 이상 한 곳에 꼳꼳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이렇게 재택근무에 대한 나의 로망은 깨어졌다. 나처럼 완벽주의 그리고 원칙주의 성향의 사람은 오히려 근무 시간과 근무 외 시간이 공간에 의해 분리되는 전통적인 근무 방식이 더 바람직할지도 모르겠다. 일을 대충 할 줄 모르는 나 같은 사람에게 재택근무는 집이 아니라 직장에서 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경영자가 되어야 하나 보다. 조직을 위해 헌신하는 일개 직원으로 남기에는 참 아까운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기분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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