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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May 31. 2020

장독대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났다. 전날 밤늦게까지 티브이를 보는 것으로 매일 저녁 열 시경 잠이 들어 아침 여덟 시부터 일을 시작하는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것과 그다지 다지 않은 나 자신의 삶에 대 작은 보상을 한 후라 수면 시간이 줄어들었다. 결국 늦게까지 티브이 본 것이 보상이 아니라 토요일 아침마저 일찍 일어나는 것으로 수면 시간을 단축시킨  자학이다. 여느 때 주말 아침처럼 휴대폰으로 여러 앱들을 보고, 대화창에 답하며 시간 낭비를 하던 중에, 대략 10 분 전에 온 "퀵 출발했어요!"라는 문자를 보았다. 오토바이 퀵 배달은 꽤 빠르기 때문에, 침대에서 급히 게으른 몸을 일으켜 세워서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얼마 안 있어 빌딩 초인종이 울렸고, 마스크를 겨우 손에 쥐었을 때 현관문에서 초인종 소리가 또 났다. 부랴부랴 마스크를 쓰고 퀵 배달인에게서 반영구 쇼핑 가방을 건네받았다.


쇼핑 가방을 거실로 옮겨서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어젯밤 중고 앱에서 주문한 장독대로 만든 화분 네 개였다. 특별히 장독대 화분으로 제작된 물건이 아니고 누군가 작은 장독대 밑에 구멍을 하나 뚫어둔 것이다. 장독대 화분을 씻어서 햇볕이 내쬐는 베란다에 말렸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게으른 몸을 눕히고, 중고 앱에 가서 거래 평을 남기고 하트를 달아 둔 물건 목록을 보았다. 대부분이 장독대와 화분들이다. 요새 유독 장독대에 꽂혔다. 그중에 뚜껑이 있는 장독대 여러 개를 같이 올린 판매자가 있었다. 갖고는 싶은데 가져올 일이 막막해서, 판매자에게 퀵으로 부쳐 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다. 판매자는 퀵은 어려울 것 같고 직접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장독대 값에 퀵 비를 얹어서 주기로 속으로 생각했다. 홈쇼핑으로 주문해서 잘 안 쓰고 있는 달팽이 크림, 태반 크림, 그리고 하늬 크림에 마스크 팩을 종류별로 하나씩 담아 선물로 드려야겠고 생각했다. 하지만 '배달비 추가에 선물까지 주면 너무 과한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선물을 두고 오려찰나에 아파트 빌딩 앞에 도착했다는 전화 받았다. 문자를 주고받을 때는 분명 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전화기에서 들리는  목소리 나이가 지긋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선물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가기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동행시켜서 장독대를 하차시킨 후에 장독대 값과 배달비를 드리고 선물까지 드렸더니, 의외로 화장품 브랜드를 대번 알아보고 좋아했다. 운전을 하고 하차를 시킨 사람은 젊은 새댁이었고, 뒤에 나이 든 엄마가 타고 계셨다. 화장품 브랜드를 알아본 사람은 당연 젊은 새댁이다. 그것으로 장독대를 내가 사는 아파트까지 져다 달라고 고생시킨 것에 대한 죄책감을 씻을 수 있었다. 딸의 도움으로 뚜껑이 있는 장독대 네 개와 뚜껑이 없는 장독대 하나를 베란다로 가져다가 깨끗이 씻었다. 그리고 늦은 아점을 먹었다.


다시 게으른 몸을 소파에 눕히고 중고 앱에 거래 평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판매자가 한 시간 전에 올린 장독대 알림글을 보았다. 잔잔한 장독대는 여러 개 있으니 이번에는 큰 장독대가 갖고 싶었다. 우연히 그 판매자 장독대를 여러 개 고 있었다. 이번에도 판매자에게 가져다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았다. 곧 전화가 와서 가능하다고 하신다. 나는  판매자가 올린 장독을 다 사겠다고 했고 그분은 그렇다면 배달비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아주 좋은 거래 조건이었다. 사실 중고 앱에서는 드물게 큰 액수의 거래였기 때문에 배달비 얹어 드릴까 하다가 그냥 물건값만 송금해 드렸다. 하루 동안 장독대에 돈을 너무 많이 써 버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한 시간도 채 안돼서 아파트 빌딩 앞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급히 내려가니 판매자 부부가 SUV에서  장독대를 내렸다. "오시느라 너무 수고하셨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인에게 졸지에 끌려 와서 중노동을 하는 판매자의 부군이 "이거 싣는다고 진짜 고생했어요!"라고 볼멘소리를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미안하고 고마운 마과 동시에 왠지 르게 얄밉다는 마음복합적으로 들었다. 판매자의 부군은 바닥에 장독대를 함부로 놓으면 안 된다며 꼼꼼하게 헌 수건 헌 요가 메트 등을 깐 후에 장독대를 조심스게 내려 주셨다. 아이는 아까 장독대를 옮기는 것 도와준 이후에 하필 이번 판매자에게 전화를 받기 직전에 화장실 가서 같이 내려오지 못했다. 판매자의 부군마치 다정하면서도 간섭하기 좋아하는 친정 오빠 같은 (아버지라고 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기 때문에) 친절한 잔소리를 늘어놓고는, 재활용 창고에서 박스를 가져다가 요가 메트 위에 있던 장독대를 박스 위에 옮겨 놓고는 판매자와 같이 떠났다. 판매자는 "다음에 장독대를 또 사면 또 가져다주겠다"라고 다. 나는 아파트 빌딩 앞에 장독대 여섯 개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혼자서 이 많은 장독대들을 옮길 수가 없을뿐더러, 깨질 수 있는 물건을 그냥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궁여지책으로 아이에게 전화를 하니 안 받다. 요새 사춘기의 절정에 다다른 아이는 좀처럼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또 전화를 했더니 이번에는 받았다. 그래서 빨리 내려오라고 촉을 했다. 그나마 아가 있어서 엘리베이터 버튼이라도 눌러 주었기에 장독대 여섯 개를 한꺼번에 옮길 수 있었다.


장 큰 크기의 장독을 포함해서 여섯 개를 옮기는 것이 쉽지 않았다. 큰 장독을 옮길 때는 아이와 함께 들어야 했다. 둘이서 끙대며 장독 옮기면서, 사춘기 아이는 또 우스워 죽겠단다. 내가 사춘기 아이의 변덕스러움을 이해하지 못하듯, 아이는 내가 참 유별난 엄마라고 생각한다. 평소 우리는 다정한 모녀라기보다는 그다지 안 친한 친구 같은  모녀다. 어쨌든 장독대를 거실까지 옮기는 데는 성공했는데, 둘 곳이 적당하지 않았다. 안방 옆 베란다는 이미 텃밭 채소 화분들과 아침에 져다 놓은 장독대로 가득 차 있었다. 거실 옆 베란다는 강아지 집이 놓여 있어서 불안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거실 여기저기에 공간이 보이는 데마다 두었다. 에어컨 옆에 하나, 책상 밑에 두 개, 티브이 옆에 두 개,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결국 강아지 집이 있는 거실 옆 베란다에 두었다. 아까 '저런 친정 오빠가 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이 들게 한 판매자의 부군이 독을 한 번 씻었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독도 씻지 않았고, 수고스럽게 배달하게 한 죄책감도 태여 씻지 않았다. 살다 보면 내 익을 위해 남을 수고스럽게 하는 일도 있고, 또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거래를 추구하는 것이 평범한 삶의 일부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집안 구석구석 놓여 있는 장독대를 바라보고 있려면, 볼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힐링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아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렸을 때 살던 시골집에 저렇게 큰 장독대가 엄청 많았어. 우리 엄마는 땅도 있고 장독대도 많았거든. 어렸 때는 그게 좋은 건지도 몰랐는데 이제 나도 우리 엄마처럼 땅도 있고 장독대도 많은 그런 데서 살고 싶어."

그랬더니 우리 사춘기 반항 끝판왕  따님 가라사대:

"엄마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 하는지는 알겠는데, 나한테는 안 먹힌다고요!"

그 말을 은 후, 잘 모셔둔 장독대 하나 열 아이 안 부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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