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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Jul 11. 2020

글에도 인격이 있다

자기 성찰

먼저 이 글을 쓰기 전에 글의 종류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검색 결과로 크게 정보 전달의 글, 설득하는 글, 사회적인 상호 작용의 글, 정서 표현의 글이 있었다. 이 중에 내가 주로 쓰는 글은 정서 표현의 이지만 가끔 사회적 상호작용을 위한 글을 쓰기 한다. 사실 글쓰기에 있어서 어떤 종류의 글을 어떻게 쓰느냐라는 기술적인 문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글 속에 담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작가의 태도 또한 중요하다고 본다.


글을 쓸 공간이 필요해서 브런치를 시작한 초창기에 나는 주로 글쓰기에 바빴고, 다른 작가의 글은 거의 읽지 않았다. 그러다가 간간히 다른 작가들이 쓴 글들을 읽게 되었고, 어떤 때는 글을 읽고 댓글을 남기게 되었다. 남이 쓴 글에 굳이 댓글을 남길 필요가 없지만, 글 쓴 사람에게 피드백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내가 상당히 직선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 드라마를 보면서였다. 드라마 광고 문구에 직녀 ***이라고 나온 구절이 있었다. 드라마 속의 녀의 생각과 행동이 어느 정도 나와 유사한 면이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의 글을 읽고 (직선적으로) 댓글을 달고 나면 친절하고 섬세하게 답글을 달아주는 작가들도 꽤 있었다. 어떤 때는 작가의 생각과는 다소 다른 내 생각을 적고 나면 갑자기 작자의 글이 사라져서 안타깝기도 했다. 그러다가 사건이 터진 것은 최근 어떤 글을 읽고 댓글을  이후였다.


나는 브런치에서 소개된 어느 작가의 글을 우연히 보읽었다. 아주 짧은 글이 었는데 요지는 대충 이러했다. 별 대단한 작가도 아니면서 독자가 댓글 달면 이유도 밝히지 않고 답글도 달지 않는 다른 작가들의 글을 자신은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치지 못하고 한마디 남겼다. 답글을 다는 작가도 달지 않는 작가도 나름의 철학이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랬더니 별 댓글 같지 않은 것을 달면서 시간 낭비를 했다는 둥, 난독증이 있는 데다가 단어 뜻도 모르냐는 둥, 심지어는 본인과 생각이 다르니 자신의 공간에서 나가라더니 내가 마지막으로 남긴 답글은 아예 삭제를 해 버린다.


브런치에서 다양한 작가가 쓴 다양한 글을 읽어 보고 많은 댓글을 남겨 봤지만, 그렇게 편협하고 유치한 작가의 답글은 처음 보았다. 그래서 지금도 생각하면 헛웃음이 난다. 사람들이 흔히 말한다. 운전에도 인격이 있다고 말이다. 차라는 작은 공간에서 운전대 뒤에서 수많은 타인을 지나쳐 가면서 운전자들은 남보다 좀 더 먼저 가기 위해 끼어들기를 밥 먹듯 하고, 인도에서 보행자들에게 양보하지 않고,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때론 교통신호를 무시한다. 그런데 우연히 읽고 댓글을 남겨 짧은 악연을 맺은 그 작가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글에도 인격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본인의 기분이 나쁘다고 상대를 대놓고 무시하고, 자신의 맘에 안 든다고 저리 가라는 식의 유치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어른의 몸에 갇힌 취학 전 아동 정도의 인품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있는가 한번 되돌아보게 되었다. 주로 현재의 심리 상태나 일상생활에서 보고 느낀 점을 단순히 기록하는 정도의 가벼운 글이지만 그동안 나의 복잡한 심정을 토해내는 목적으로 글을 써 온 것 사실이다. 내 글을 읽어 주는 소수의 독자 외에는 그다지 읽히지 않는 글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기록의 목적이나 자기만족을 위해 줄곧 써 왔었다. 하지만 그중에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쓴 글도 있고 불평과 불만을 터트린 글도 있다. 내가 여태껏 써온 글들이 읽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비쳤을까? 나의 글 나의 인격을 잘 반영하는가? 새삼스레 자문하게 된다.


특별하지도 않은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께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앞으로 글과 인격에 대해서 더 진중하게 생각하고 어떤 글이든 써야겠다고 다짐한다. 그것이 다른 사람이 쓴 글에 대한 댓글이라도 말이다. 어쩌면 온라인 상에서의 짧은 악연은 실생활에서 불가피한 악연에 비하면 가벼운 고통일 수 있다. 학창 시절 어느 문학 교수님이 전에 이런 주제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깨닫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경험을 해도 깨닫는 사람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이다. 어떤 경험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축복임에는 틀림없다. 경험을 통해 닫지 못한다면 (나쁜) 역사는 되풀이될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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