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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Oct 13. 2020

멀쩡해지기까지 남은 시간 세 시간

SPAM이 된 여자

꿈속에서 고등학교 선생님들을 보았다. 내가 짝사랑했던 국어 선생님, 장난기 많고 작은 키에 다정했던 일어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과 같이 건물에서 나와 강의실로 향할 때 (그렇다. 내가 나온 건물은 분명 대학교 강의실이었다.), 나는 선생님들이 나오는 건물로 들어가려고 밖에서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국어 선생님이 나를 쳐다보시며 의아한 표정을 지으셨다. 나는 살짝 난처해하며 말했다: "화장실 가야 해요!"


나는 안방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화장실에 갔다. 방광을 시원하게 비우고, 침대 옆에 둔 작은 원탁 위에 쌓여 있는 약봉지, 선글라스, 마스크 등등 사이에서 스마트 폰을 집어 들었다. 시간을 확인하니 겨우 네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머릿속으로 빨리 계산을 하려다가 결국 손가락으로 세어 본다. 구, 십, 십일, 십이, 일, 이, 삼, 사. 그래도 여덟 시간을 잤으니 잠이 부족하진 않겠다고 생각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또 잠시 생각해 보았다. 언제부터 전쟁과 같은 주중보다, 주말이 나에게 더 힘들어졌을까? 공휴일이 낀 이번 주말은 너무 힘들었다. 삼일 동안 술을 마셨고, 세 남자와 연락을 했다. 그중 한 명은 호적에 있는 <내편>이고 다른 한 명은 일 년에 한 번 정도 연락하는 남자사람친구다. 나는 가끔 객관적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것을 즐긴다. 호적상 <내편>인 사람과 비슷한 남자와 애지중지 키운 우리 딸이 결혼을 한다면, 물론 "No!"다. 그런데 금이야 옥이야 키운 내 아들이 나 같은 여자와 결혼을 한다고 해도 답은 같다. <내편>도 나도 이상적인 남편이나 이상적인 아내는 아닌 것이다.


몇 시간 후면 나는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 입고, 나를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들 앞에서, 멀쩡한 표정을 지으며 주말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능청스럽게 지난 십 년 간 해 왔던 일을 할 것이다. 그건 꼭 내가 위선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냥 인생이 그렇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 (오늘 새벽에 독자님 중 한 분께서 나에게 상당한 관심과 격려를 보내 주셔서 깜짝 놀랐고 정말 감사했다. 이런 일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이번 주말에 나와 연락한 남자 중의 한 명도 그랬다. 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사뭇 놀란 듯했고, 약간  불쾌하게 느낀 듯했다. 만약에 속사정을 다 알고 나면 정말 불쾌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해도 미친 짓이다. 알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정신과 상담을 받거나, 갑자기 모든 것을 접어야 할 정도로 일상을 이겨내지 못할 것 같다.


나는 항상 솔직함을 무기로 삼는다. 내가 솔직하게 말하면, 상대방은 나를 미워할 수가 없고, 나 또한 죄책감으로 나 자신을 괴롭히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나와 연락한 세 남자 중의 두 남자는 어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안다. 하지만 세 번째 남자의 사정은 달랐다. 사실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꼭 연락을 하고 싶었다면 십 년이나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인터넷으로 그의 이름을 검색하던 중 제일 먼저 나온 것은 *** 아버님의 부고 소식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내가 엄마를 여위고 삼일장을 치른 그 시기에 같은 장례식장에서 그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보낸 것이었다. 이틀 차이로. 그의 아버지의 발인 날에 우리는 삼일장을 시작했었다. 사실 엄마가 돌아가신 날은 하루 전이었는데, 갑자기 장례식을 준비하려다 보니 전국에 흩어진 가족과 친척을 모으느라 하루 미뤄야 했다.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마주치지 않았다. 만약에 마주쳤다면 어땠을까? 부모를 잃은 슬픔으로 서로의 존재는 아무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일이 있은 지 구 개월이 지난 지금에도 서로의 존재나 부재가 아무 의미가 없듯이 말이다.


일요일 그의 연락처를 보고, 월요일 아침 이메일을 보냈다. 회사 이메일로 자세히 쓸 수가 없어서 간단하게 연락처만 남겼다. 칼을 뽑으면 무라도 자르는 나의 성격에 오늘 시작한 일을 내일까지 미룰 수 없었다. 내일이면 나는 다시 멀쩡한 사람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연락이 오길 기다리며 일단 해야 할 일들을 했다. 빨래와 설거지를 하고, 피부과 병원에 갔다. 동네의 작은 피부과에 갔더니, 가자마자 진료를 볼 수 있었다. 진료실 안에 앉은  중년의 남자가 다정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떻게 오셨어요?" 라는 피부과 의사 선생님의 질문에, "등에 뭐가 났는데 안 없어져요!"라고 대답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 한번 볼까요?"라고 하셨다. 나는 반팔 셔츠를 벗듯이 들어 올렸다. 브래지어 끈 밑 부분도 살짝 올려서 최대한 많이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의사 선생님이 문진을 마치시고 친절하게 브래지어까지 내려주신다. 그리고는 대번에 처방전을 써 주시려고 했다. 나는   전에 다른 병원에서 받은 약봉지와  연고 상자를 의사 선생님께 보여 드리며, 그 약이 효과는 그다지 없었다고 말했다. 처방전을 받아 들고 나오는 데까지 걸린 시간을 대략 3분. 3분에 1만 6천 원... 나쁘지 않은 벌이였다. 작은 피부과에서 하루에 환자가 얼마나 많이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짧은 시간에 적지 않은 돈을 벌 수 있으니 의사라는 직업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바로 밑의 약국에서 약을 받았다. 2만 5천 원. 의사 선생님이 다음 주에도 오라고 했으니, 그때까지도 안 나으면 또 4만 원가량 들겠구나 싶었다.


약국을 나와서 시내 쪽으로 한참 걸었다. 딸이 발이 아프다고 다. 아파트를 나오자마자 발이 불편하다고 해서, 나와 신발을 바꿔 신었었다. '도대체 발이 얼마나 크길래 아프다고 할까?' 걷고 또 걸어서 아이가 좋아하는 옷가게에 들렀다. H&M이라고 시내에 있는 옷가게 중에 몇 안 되는 익숙한 브랜드의 가게다. 나도 아이 나이 때는 브랜드가 중요했던 것 같다 (한 번도 갖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나는 가자마자 구석에  쪼그리고 앉을 데를 찾았다. 종종 있는 일이다. 쇼핑을 즐기지 않는 나와 쇼핑을 즐기는 아이의 일종의 협상 같은 거다. 나는 구석에서 기다리고 아이는 옷을 고르고... 아이는 스웨터 두 개와 신발을 골랐다. 언제 가격을 확인했는지, "스웨터가 너무 비싸면 둘 중 하나만 사도 돼요, 엄마!"라고 말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털 스웨트는 관리가 힘들다며 나는 개 중에 하나는 차라리 바지로 바꾸라고 했다. 한참 둘러보더니 바지는 싫단다. 계산을 하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책방에 갔다. 나는 책방 안에 있는 카페로 가서 생수를 한 병 샀다. 목이 말라서 다른 음료를 마시기는 싫었다. 내가 구석에 있는 탁자에 앉았을 때는 오후 네 시가 약간 지난 시간이었다. 나는 전화를 했다:


: 여보세요. (그가 전화를 받았다.)

나: 저~~**이야.

: 응.

나: 일하는 데 통화 길게 안 할게.

: 괜찮아. 말해봐.

나: 아까 이메일 보냈는데. 어?

: 아니, 못 봤는데... 잠시만... 스팸인 줄 알고 지워버렸어.


몇 년 전 결혼해서 아이가 하나 있는 그에게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나는 스팸 같은 존재였다. 하하하하하하하... SPAM...


noun
1. irrelevant or inappropriate messages sent on the Internet to a large number of recipients.

2. TRADEMARK
a canned meat product made mainly from ham.


Definitions from Oxford Languages


물론 1번의 뜻으로 한 말이지만, 왠지 2번이 된 것 같은 느낌. 어떤 뜻으로 했든 간에 느껴지는 불쾌함.


지금의 나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호적상 <내편>도, 다른 누군가도 아닌, 나뿐이다. 세월은 사람을 많이 변하게 한다. 검은 머리를 하얗게 만들고, 소중한 추억도 스팸이 된다. 그렇게 지난 십 년을 기다려온 나의 연락은 무참히 끝이 났다. <오래전 일이지!>라고 빨리 정리를 해 주는 그가 고맙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는 공존할 수 없다. 현재가 된 과거가 아니라면. 호적상 <내편>의 넓은 아량마저 SPAM이라는 한 마디로 무색해져 버렸지만, 멀쩡해져야 하는 시간을 세 시간 앞두고, 어제 있었던 일을 되돌아보니 한바탕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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