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서 글을 썼다. 그리 길지도 않은 글을 적으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나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비움> 의식 같은 거다. 내 머릿속의 기억을 지우고, 내 맘 속에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버린다. 글을 쓰고, 출근 준비를 했다. 네 시에 일어나서 8:10 분 직장에 도착하는 시간까지는 무려 네 시간이나 있었지만, 나는 그 네 시간 동안 간단한 출근 준비를 하지 못했다. 씻고, 옷을 입고, 화장을 마친 후 시계를 보니 벌써 8:05분이었다. 5분 안에 직장에 도착할 수도 없지만, 강아지산책시키러 나간 아이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집을 나서며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이에게 서둘러 나오라고 했다. 차를 건물 앞에 세우고 아이를 기다리면서 직장에 전화를 했다. 오늘 늦는다고!
첫 번째 업무 미팅 5분 전에 가까스로 도착하고, 두 번째 미팅을 마친 후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점심시간마저도 일을 해야 했다. 오후에 있는 세 번째 미팅을 마치고 나니, 갑자기 전체 직원회의 소집이 있었다. 직원회의와 시간이 겹친 다른 화상회의에 늦게 참여하니, 아직 미팅이 끝나지 않아 다행히 약간의 회의 내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퇴근 시간이 두 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밀린 업무 이메일을 다 보내고 내일 회의 준비까지 마칠 수 있었다. 건물 나오는 길에 대표와 부대표가 내일 있을 중요한 행사준비를 하는 게 보여 얼굴 도장을 찍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 오늘 아침 15분 지각에 2시간 30분 추가 근무를 해 줬으니 나를 나무라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건물을 나왔다. 주차장에 쓸쓸히 홀로 남은 내 차가 나를 반겼다.
주말이 엉망이 되면 주중의 업무흐름 또한 엉망이 된다. 점심시간도 놓치고, 퇴근 시간도 늦어지고, 안 해도 될고생을 사서 하게 되는 것이다. 평소에 감정을 잘 다스려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해 본다. 요즘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 중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분노>다. 층간소음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나에게 많은 후유증을 남긴다. 휴식할 수 없는 주말, 엉망이 되는 주말 스케줄, 스트레스로 인한 몸의 반응, 그리고 상실감... 내가 쉴 곳이 없다는 것은 나에게 큰 상실감을 준다. 나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많은 것을 후회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왜 덜컹 아파트를 샀을까? 왜 나는 이곳에 있는가? 왜 나는 이곳에 오게 되었는가? 등등. 부정적인 생각의 고리를 잘라내야 하는데, 그게 쉽게 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쓰는 이 글을 주말에 꼭 읽어 보아야겠다. 그래야지 악순환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아니라, 나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받아들이려고 하는 자세>다.
오늘 출근 전에 쓴 글이 <멀쩡해지기까지 남은 시간 세 시간: SPAM이 된 여자>였다. 그 글을 읽고 우리 부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오해를 할 만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여기서 자세히 언급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첫째, 우리 부부는 직장 때문에 떨어져 사는 기러기 부부이며, 둘 다 상당히 '가정적'이다. (아마도 여기서 '가정적'이라는 말은 '외도를 하지 않는다'라는 뜻이 내포된 듯하다.) 굳이 밝힐 필요도 없지만, 굳이 밝히지 않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둘째, 그 글에서 언급한 세 남자 중 한 명은 남편, 한 명은 친구, 그리고 한 명은 예전에 사귄 사람이다. 친구는 일 년에 한 번 연락할까 말까 하는 정도이며, 전에 사귀었던 사람은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나를 스팸 보듯 하는 사람이다. 끝까지 내 곁을 지킬 사람은 당연히 <내편>이다. 남편은 나보다 나이도 어린데, 이제 나이 들어가면서 그다지 예쁘지도 않은 부인을 너무 사랑한다고 한다. (말이라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능력임에는 틀림없다.) 매일 문자를 보내서 내가 잘 지내는지 확인한다. 오늘도 문자를 받고, 남편이 묻지도 않는 내용을 보고했다. "어제 내가 전에 사귄 남자한테 이메일을 보냈는데 글쎄 스팸인지 알고 지웠대." 그 말을 듣고 남편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본인한테는 너무 예쁘고 매력적인 부인이 (남편은 항상 말이라도 그렇게 한다. ㅋ) 다른 남자에게 스팸 취급을 받았다는데 적잖이 놀란 것이다. 남편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에 나는 "사람이 다 다르니까, 갑작스러운 일에 대응하는 그 사람의 방식은 그런 가 봐."라고 말했다. 아마도 이 일이 있은 이후로 남편은 내가 다른 남자와 연락하는 것을 쉽게 허락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 같다. 자신의 소중한 부인이 다른 남자에게 부적절한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날 테니까 말이다. 아니면, 자신을 버리고 떠날 일이 없을 것 같아 안심이 될까? 남편이 어떻게 생각하든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각자의 인생에서 이십 년이상을 투자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고 열두 시간 만에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피부과에서 받아 온 약을 먹으려면 밥을 먹어야 하고, 또 굳이 다이어트를 할 필요도 없으니까 평소 나의 신조대로 <먹기 위해 사는> 삶을 실천했다. 충무 김밥과 따라온 1/2 우동을 먹었다. '역시 김밥은 충무 김밥이야!'라고 생각하면서. 이제 씻고 자면 내일 아침이 곧 올 것이다. 그럼 나는 다시 똑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하루 종일 있는 여러 미팅에 참여하고, 업무 이메일을 보내고, 회의 준비하고 등등... 먹기 위해 사는 삶, 내일은 점심시간을 반드시 사수하리라! 는 목표가 생겨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