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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Oct 13. 2020

월요일 같은 화요일

새벽에 일어나서 글을 썼다. 그리 길지도 않은 글을 적으려면 꽤 시간이 걸린다. 나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비움> 의식 같은 거다. 내 머릿속의 기억을 지우고, 내 맘 속에 남은 감정의 찌꺼기들을 버린다. 글을 쓰고, 출근 준비를 했다. 네 시에 일어나서 8:10 분 직장에 도착하는 시간까지는 무려 네 시간이나 있었지만, 나는 그 네 시간 동안 간단한 출근 준비를 하지 못했다. 씻고, 옷을 입고, 화장을 마친 후 시계를 보니 벌써 8:05분이었다. 5분 안에 직장에 도착할 수도 없지만, 강아지 산책시키러 나간 아이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집을 나서며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이에게 서둘러 나오라고 했다. 차를 건물 앞에 세우고 아이를 기다리면서 직장에 전화를 했다. 오늘 늦는다고!


첫 번째 업무 미팅 5분 전에 가까스로 도착하고, 두 번째 미팅을 마친 후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점심시간마저도 일을 해야 했다. 오후에 있는 세 번째 미팅을 마치고 나니, 갑자기 전체 직원회의 소집이 있었다. 직원회의와 시간이 겹친 다른 화상회의에 늦게 참여하니, 아직 미팅이 끝나지 않아 다행히 약간회의 내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퇴근 시간이 두 시간이나 지난 후에야 밀린 업무 이메일을 다 보내고 내일 회의 준비까지 마칠 수 있었다. 건물 나오는 길에 대표와 부대표가 내일 있을 중요한 행사 준비를 하는 게 보여 얼굴 도장을 찍기 위해 손을 흔들었다. 오늘 아침 15분 지각에 2시간 30분 추가 근무를 해 줬으니 나를 나무라진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건물을 나왔다. 주차장에 쓸쓸히 홀로 남은 내 차가 나를 반겼다.


주말이 엉망이 되주중의  업무 흐름 또한 엉망이 된다. 점심시간도 놓치고, 퇴근 시간도 늦어지고, 안 해도 될 고생을 사서 하게 되는 것이다. 평소에 감정을 잘 다스려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해 본다. 요즘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 중에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분노>다. 층간소음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나에게 많은 후유증을 남긴다. 휴식할 수 없는 주말, 엉망이 되는 주말 스케줄, 스트레스로 인한 몸의 반응, 그리고 상실감... 내가 쉴 곳이 없다는 것은 나에게 큰 상실감을 준다. 나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많은 것을 후회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왜 덜컹 아파트를 샀을까? 왜 나는 이곳에 있는가? 왜 나는 이곳에 오게 되었는가? 등등. 부정적인 생각의 고리를 잘라내야 하는데, 그게 쉽게 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쓰는 이 글을 주말에 꼭 읽어 보아야겠다. 그래야지 악순환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아니라, 나 스스로 <바꿀 수 없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자세>다.


오늘 출근 전에 쓴 글이 <멀쩡해지기까지 남은 시간 세 시간: SPAM이 된 여자>였다. 그 글을 읽고 우리 부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오해를 할 만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여기서 자세히 언급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첫째, 우리 부부는 직장 때문에 떨어져 사는 기러기 부부이며,  둘 다 상당히 '가정적'이다. (아마도 여기서 '가정적'이라는 말은 '외도를 하지 않는다'라는 뜻이 내포된 듯하다.) 굳이 밝힐 필요도 없지만, 굳이 밝히지 않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둘째, 그 글에서 언급한 세 남자 중 한 명은 남편, 한 명은 친구, 그리고 한 명은 예전에 사귄 사람이다. 친구는 일 년에 한 번 연락할까 말까 하는 정도이며, 전에 사귀었던 사람은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나를 스팸 보듯 하는 사람이다. 끝까지 내 곁을 지킬 사람은 당연히 <내편>이다. 남편은 나보다 나이도 어린데, 이제 나이 들어가면서 그다지 예쁘지도 않은 부인을 너무 사랑한다고 한다. (말이라도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능력임에는 틀림없다.) 매일 문자를 보내서 내가 잘 지내는지 확인한다. 오늘도 문자를 받고, 남편이 묻지도 않는 내용을 보고했다. "어제 내가 전에 사귄 남자한테 이메일을 보냈는데 글쎄 스팸인지 알고 지웠대." 그 말을 듣고 남편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본인한테는 너무 예쁘고 매력적인 부인이 (남편은 항상 말이라도 그렇게 한다. ㅋ) 다른 남자에게 스팸 취급을 받았다는데 적잖이 놀란 것이다. 남편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에 나는 "사람이 다 다르니까, 갑작스러운 일에 대응하는 그 사람의 방식은 그런 가 봐."라고 말했다. 아마도 이 일이 있은 이후로 남편은 내가 다른 남자와 연락하는 것을 쉽게 허락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 같다. 자신의 소중한 부인이 다른 남자에게 부적절한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날 테니까 말이다. 아니면, 자신을 버리고 떠날 일이 없을 것 같아 안심이 될까? 남편이 어떻게 생각하든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각자의 인생에서 십 년 이상을 투자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고 열두 시간 만에 점심 겸 저녁을 먹었다. 피부과에서 받아 온 약을 먹으려면 밥을 먹어야 하고, 또 굳이 다이어트를 할 필요도 없으니까 평소 나의 신조대로 <먹기 위해 사는> 삶을 실천했다. 충무 김밥과 따라온 1/2 우동을 먹었다. '역시 김밥은 충무 김밥이야!'라고 생각하면서. 이제 씻고 자면 내일 아침이 곧 올 것이다. 그럼 나는 다시 똑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하루 종일 있는 여러 미팅에 참여하고, 업무 이메일을 보내고, 회의 준비하고 등등... 먹기 위해 사는 삶, 내일은 점심시간을 반드시 사수하리라! 는 목표가 생겨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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