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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Oct 19. 2020

갑자기 훅 들어온 관장제 이야기

층간소음 스트레스로 생긴 피부염 치료를 위해 처방받은 항생제 일주일 분을 다 복용하고, 피부과에 다시 가려고 잔무로 약간 늦어진 퇴근을 서둘렀다.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몇 블록 떨어진 피부과에 갔다. 작은 피부과치곤 많이 북적댔지만, 대기실에서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진료를 볼 수 있었다. 피부과 의사 선생님께 피부염 이외에도 궁금했던 다른 질문도 하고 답도 들은 후에 처방전을 받아 바로 밑에 있는 약국에 갔다.


유난히 작은 약국은 평소보다  더 붐비었다. 내 앞에 온 손님이 셋 정도 있었는데, 약사 선생님께 내 처방전을 건네주었을 때, 약국 문을 쑥 열고 들어 온 나이 드신 아주머니가, 약사 선생님께 다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관장약 세 개 주이소.

약사 선생님: (관장약 세 개를 건네며) 구 백원예.

아주머니: 세 개 다 합쳐서예?

약사 선생님: 예!

아주머니: (그 자리에서 관장약상자를 뜯어서 관장약을 꺼내 들고) 그런데, 이거 찌 쓰는 거라예?그냥 넣고 쭉 짜면 돼예?(유난히 목소리가 큰 아주머니셨다. 엄지 손가락 길이에 엄지손가락 두 개를 합쳐 놓은 것 같은 두께의 튜브 안에 맑은 액체에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약사 선생님: 예, 그대로 항문에 넣고 쭉 짜면 돼예.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관장약을 넣는 시늉을 하신다.) 그런데 이거 넣을 때 항문이 하늘을 향하게 해야지 안 그라모 다 흘러내립니더. 넣고 난 다음에 바로 움직이면 안 되고예, 그대로 한 십 분 정도 있어야 됩니더.


약국이 하도 협소해서 오른쪽 구석에 서 있었지만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과의 거리는 불과 두 발자국밖에 되지 않았다. 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왼쪽에 서 있는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은 마치 아무 얘기도 못 들었다는 듯 경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스크 밑으로 나는 입이 귀에 걸리도록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사실 이런 경은 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다.


The Health Insurance Portability and Accountability Act of 1996 (HIPAA) required the Secretary of the U.S. Department of Health and Human Services (HHS) to develop regulations protecting the privacy and security of certain health information.


출처:https://www.hhs.gov/hipaa/for-professionals/security/laws-regulations/index.html


HIPAA 규정에 의해 각 개인의 건강에 관한 사적인 정보가 보호받기  때문이다. 주로 약국에서 약을 받기 전에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거나, drive through 같은 곳에서 먼저 온 손님이 약을 받아간 후에야 다른 손님이 자신의 약을 받아갈 수 있다. 손님은 한 번에 한 사람씩 받고, 가능한 한 손님과 손님 사이의 간격을 넓혀서, 약사와 손님의 대화가 다른 손님에게 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 지금 이 상황에서 HIPPA 규정을 어긴 사람은 누구일까? 목소리 큰 아주머니? 온몸으로 관장법을 설명하시는 약사? 아니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 아마도 모두에게 조금씩의 책임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너무 크고,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워 나는 자제력을 잃고 말았다.


주머니: 제가 쓸 게 아니고예...백 세 되신 우리 엄만데, 누워서 꼼짝 못 하십니더. 제가 해 드려야 돼예. 그라모 관장한 다음에 안 흐르도록 막고 있어야 돼예? 제가 손으로 막을까예?(하늘로 향한 항문을 막고 있는 손이 상상되면서 나는 하마터면 마스크가, 아니면 배꼽이, 아니면 항문이 찢어지도록 웃을 뻔했다.)

약사 선생님: (약간 머뭇거린 후에) 그건 요령껏 알아서 하이소. 그냥 (다시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며) 항문이 하늘을 향하게 하고 약을 쭉 넣은 다음에 그대로 한 십 분 정도 있으면 돼예.

아주머니: 나이 드신 분 집에서 보살피려니까 너~무 힘들어예.

약사 선생님: 그렇지예~ 그래서 다들 요양원 안 보냅니꺼! 아무튼 고생이 많십니다.


그렇게 이야기는 훈훈하게 마무리되었고, 아주머니는 관장약 세 개를 들고 약국을 떠났다. 살면서 <항문>이라는 단어를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 해부학 실습을 할 때조차 항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었다.


사실 언젠가부터 모든 사람들에게 <항문>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이 나에게 너무 낯설게 다가왔다. 어떤 때는 <항문>이 달린 사람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불혹이 넘은 사람이 갖기에는 너무도 유치한 생각이다. 한 번은 직책이 S(-xxx)로 시작하는 어떤 사람에게 (농으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I cannot take your job seriously since your job title starts with an S."


갑자기 훅 들어온 관장약 이야기로 <항문>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듣고 동시에 관장약 사용법을 너무도 자세히 두 번이나 듣고 난 후에, 나는 관장 약값을 지불하지도 않고, 관장을 두 번이나 받은 것 같은 정신적 혼란을 겪으며, 처방받은 약을 받아 들고 약국을 나왔다.


끝으로 <아재 개그>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학문과 항문의 공통점은?

1. 닦아야 한다

2. 내 손에 달렸다

3. 끝이 보이지 않는다

4. 누구에게는 흥미롭고, 누구에게는 귀찮다


이상은 평생 학문과 항문을 동시에 닦으며 얻은 깨달음에서 나온 유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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