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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Nov 12. 2020

지속 가능한 친절

 vs. 억지스러운 관대함

오바마 대통령 초임 시절 나는 미국 어느 소도시의 시립 도서관에서 근무를 했다. 그때 같이 근무하던 동료 중에 약간 쌀쌀맞은 사십 대 초반의 여자 동료가 한 명 있었다. 차가운 성격의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나도 가까워지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는데, 같은 곳에서 일을 하다 보니 그 사람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남편은 그 도시 4년제 대학 생물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고, 그녀 역시 같은 대학에서 생물학 교수로 5년을 있다가 갑자기 대학을 떠났다고 했다. 교수직을 포기하고 도서관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며, 취미 생활로 인형을 만들어서 웹 페이지에 올려 판다고 했다. 그 사람은 sustainability(지속가능성)에 관심이 많았고, 뉴멕시코에 sustainability를 최대로 고려해서 새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어느 날 자랑스럽게 말했다.


Sustainability에 관한 다음의 정의를 살펴보자.

What Is Sustainability?

Sustainability focuses on meeting the needs of the present without compromising the ability of future generations to meet their needs. The concept of sustainability is composed of three pillars: economic, environmental, and social—also known informally as profits, planet, and people.


출처

https://www.investopedia.com/terms/s/sustainability.asp#:~:text=What%20Is%20Sustainability%3F,profits%2C%20planet%2C%20and%20people.


"우리가 현재 필요한 자원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미래 세대를 위한 자원도 충분히 남겨두는 것"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 쌀쌀맞은 동료가 미래의 자원을 고민하고 있을 때 나는 '어린아이 둘을 어떻게 키울까?' 하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은 고민을 했었다. (글을 쓰다 보니 생각났는데, 그 사람은 아이가 없었다.) 나는 가난하고 굶주린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북극곰을 살리기 위한 기부 활동은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나는 이제 내 아이만을 위한 생각에서 남의 아이를 걱정할 수 있는 정도로 성숙했지만, 병든 지구를 위한 걱정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마도 지구 멸망이 일어나기 전에 나와 내 아이 세대가 먼저 죽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한편, 옥스퍼드 사전에서 sustainable (지속 가능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able to be maintained at a certain rate or level.


최근 나의 친절에 대해 고민하게 된 사건이 두 차례 일어났다. 하나는 직장에서 일어난 일인데, 매주에 한 번씩 같이 팀 회의를 해야 하는 그룹이 있다. 한 명은 회의에 잘 오지도 않고, 있어도 기여도가 너무 낮다 못해 없다고 할 수 있다. 한 명은 그런 그가 못마땅해서 회의 참여 태도가 나쁘다. 한 명은 팀이 하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lukewarm 한 태도로 지치게 한다. 회의가 마칠 시간이 다 돼 갔을 무렵에는 기여도 낮은 사람이 이미 떠난 지 30분은 족히 넘었을 때였다. 그 사람을 싫어하는 다른 사람도 떠났고, 나와 lukewarm 둘이 남았다. (그 전 주에도 둘이 남아서 그 사람에게 일대일 질의응답을 하느라 한 시간을 더 소모했다.) 그는 다짜고짜 나에게 내가 가진 자료를 다 내놓으란다. 토요일 일요일 가리지 않고 세 달 동안 작업한 나의 지적 재산을 너무 당당하게 요구했다. 칼만 안 들었지 강도였다. 그래서 그에 상당하는 당신의 자료를 내놓기 전에는 못 준다고 했다. 그랬더니 불쾌하단다. 나는 그의 불쾌하다는 말에 정말 꼭지가 돌 뻔했다. 와아~ 그간 협업이라는 미명 아래 내가 그들과 공유한 자료, 아이디어, 시간 투자가 팀의 다른 사람들의 기여도를 다 합친 것 보다도 훨씬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지적 재산을 아무 대가 없이, 자기 것인 양 요구하는 그의 태도에 나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다음 날이 휴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날 밤, 그다음 날도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일을 했다. 일에 집중한다고 해서 불쾌함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휴일이 끝나고 출근길에 엘리베이터에서 옆집 남자와 마주쳐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그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다가 옆집 앞에 놓인 똥기저귀 쓰레기를 보았다. 곧 가스 안전 점검을 받을 시간이라 밖에 나갈 수도 없었지만, 몸이 너무 피곤한 데다가 며칠 전 직장에서 있었던 일로 마음까지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집에 오자마자 남의 집 쓰레기를 버려준다고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귀찮아도 퇴근하자마자 바로 내다 버려 주었다. 어딘가에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친절이 반복되면 받는 사람은 그것을 권리로 착각한다." 저녁에 아이가 강아지 산책을 시키고 돌아왔을 때 옆집 앞 쓰레기에 대해 물어보니 다행히 없었다고 했다. 만약 있었다면, 밤새 그냥 뒀다가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갖다 버리려고 했다. 그랬더라면 나는 아침부터 남의 집 쓰레기를 가지고 출근을 하며 불쾌했을 것이다.


나는 차가운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가능하면 잘하려고 하고, 좋게 지내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 <친절 총량의 법칙>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한두 번은 넘길 수 있는데, 상대방의 무례함이나 배려 없음이 세 번 이상이 되면 잘 참지 못한다. 나의 친절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얘기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의 친절을 자신의 권리로 착각하는 사람들 못지않게 지속 가능하지 않은 친절을 베푼 나의 잘못 또한 있는 것 같다. Sustainability에 대해 고민하던 쌀쌀맞은 그 사람은 지속 가능한 친절관해 고민할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문득 배달을 시킨 식당에서 보낸 서비스로 따라온 작은 디저트에 붙여 둔 스티커에 적힌  "나는 관대하다. 서비스를 주었다고 리뷰를 바라지 않는다."라는 글이 생각났다. 처음에는 귀여웠다. 그런데 두세 번 반복되니, 내가 달라고 한 서비스도 아니고, 어떤 때는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아니고, 별 것도 아닌 걸로 생색내는 식당이 살짝 불쾌하기도 했다. 억지 미소를 짓고 있는 피에로 때문에 악몽에 시달리고 공포에 떠는 아이 마냥 억지스러운 관대함에 어딘지 모르게 불편했다. 나의 지속 가능하지 않은 친절이 타인에게는 그렇게 느껴질까? 나의 친절을 받을 그들의 권리가 부정됐을 때 그들은 그동안 베푼 나의 친절을 식당에서 따라온 서비스에 붙여진 스티커에 적힌 글귀 마냥 여겼을까? 지속 가능한 친절은 어느 정도의 친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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