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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Apr 04. 2021

시간과의 전쟁

최근 드라마 정주행을 하던 중 보았던 어느 드라마에서 한 범죄자가 "시간 강박증"이 있다고 했던 부분이 생각난다. 나 또한 마치 시간 강박증이라도 있는 듯,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항상 시간과 전쟁을 한다. 휴가철 조차도 예외일 순 없다. 봄 휴가를 받고 나름 많은 일들을 했다. 주로 집을 사고 파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봄맞이 대청소를 한 건 아니지만, 어제는 과감하게 안 입는 겨울 옷을 내다 버렸다. 안 입는 옷을 처분하기 위해 지인에게 연락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 또한 굉장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가끔 나에게 불필요한 물건을 처분하느라 내쪽에서 비용이 들기도 한다. 중고거래를 위해 사진을 찍어 올리고, 구매자와 연락을 주고받고, 약속을 정하는 것 또한 어느 정도의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된다. 그냥 헌 옷 수거함에 갖다 버리는 것이 제일 신속한 처리 방법이다. 옷을 버린 후에는 냉장고에 묵혀둔 음식을 내다 버리기 시작했다. 유통기한이 지난 것도 있고 지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일단 앞으로 먹지 않을 음식은 죄다 버리기로 했다. 이번에도 무료 나눔 하기 위한 수고는 피하기로 했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써 가며 자선 행위를 하기엔 난 이미 너무 지쳐 버렸다.


몇 해 전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은 내 인생에 너무 큰 치명타였다. 이제 사람이 싫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픈 마음이 달아나 버렸다. 나의 고통을 가볍게 여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연민을 느낄 만큼 너그러운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냥 이곳을 떠나면 그뿐이다. 햇볕도 들지 않는 곳에서 소음과 먼지에 시달리는 남은 자의 목소리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나의 고통을 외면하던 그들이 아닌가? 자신들이 만든 지옥에서 오래 살기를...


다시 시간 강박증과 드라마에 대해 못다 한 얘기를 해야겠다. 올해 들어 총 14편의 드라마를 보았다. 한 드라마는 짧게는 16회에서 보통 20회 길면 24회까지 있다. 직장이 있는 사람이 3개월 만에 14편의 드라마를 보았다는 건 내가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예전에는 실용성과 생산성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 나인데, 어떻게 그 많은 드라마를 보게 된 걸까? 나의 내면을 솔직히 들여다보면 드라마는 시간을 때우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드라마를 보면 늦은 시간에 지쳐서 잠들 수 있다. 위에서 소음이 들리면 볼륨을 높여서 어느 정도 나의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다. 이 지옥에서 살고 있고 있는 한 어떻게든 시간은 흘러야 한다.


내가 본 드라마들은 주로 액션 로맨스다. 비슷한 장르의 드라마를 여러 편 보다 보니, 모든 드라마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장면들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1. 절박한 상황에서의 키스 장면

2. 남자가 여자에게 신발 신겨 주는 장면

3. 백허그 장면

4. 남자가 자신의 재킷을 벗어서 여자의 어깨에 걸쳐 주는 장면


드라마는 현실에 찌들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픈 마음을 상실해 버린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그들과 다른 이상형을 보여 준다. 그래서 나는 그간 14편의 드라마를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열심히 보았다. 하지만 이건 나의 시간 강박증을 증명하는 것일까 아님 그 반대일까?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기 12시간 전이다. 그 12시간을 나는 어떻게 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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