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똥꽃 Apr 25. 2021

당근 하다가 당 떨어진 이야기

주말 내내 당근 앱을 붙잡고 있었다. 총 거래 완료 7건. 총 구매 내역 0건. 총판매 내역 7건. 총 판매액 0원. 이쯤 되면 돈도 한 푼 못 벌면서 왜 주말 내내 당근 앱을 붙잡고 시간 낭비를 했는지 삼척동자도 의문을 가질 것이다. 처음부터 수익을 올리려고 한 건 아니었고, 집 정리를 하면서 나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제일 먼저 고장 난 컴퓨터 가죽 의자를 처분했다. 바퀴 달리고 높낮이 조절되고 다 좋은데 그만 의자 밑에 나사가 하나 빠져 버려서 손재주 좋은 사람 고쳐 쓰라고 올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연락이 왔다. 이번 주말은 또 바람이 어찌나 부는지, 픽업하러 오는 사람이 제시간에 오지 않으면 찬 바람 속에서 서서 기다려야 했다. 예약한 사람은 좀 늦긴 했지만 약속한 장소에 나타나서 의자를 픽업해 갔다. 주말 첫 거래는 나름 괜찮았다.


곧바로 집에 와서 안 먹고 있는 잡곡쌀을 올렸다. 올린 지 2분도 안돼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그 일이 있은 후에 산모 미역을 올렸더니 마찬가지로 2분도 안 돼서 여기저기서 연락이 왔다. 무료 음식을 올리는 경우 사람들이 보내는 메시지는 아주 단호했다. <저요>, <제가 할게요>, <저 주세요> 등. 이건 마치 시간과 싸움이라도 하듯이 초를 다투며 문자를 보내고 역시나 픽업 또한 바로바로 했다. 쌀을 예약하셨던 분은 약속된 장소에 나타나지 않아 내가 무거운 쌀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게 하셨지만 그래도 따뜻한 후기를 남겨 주셨다. 미역을 예약하신 분은 빠른 시간에 약속 장소에 오셔서 가지고 가셨지만  내가 먼저 후기를 남겨서 마지못한 듯 후기를 남기셨다.


나머지 물건들은 모두 옷과 인형이었다. 첫 옷 거래는 아이가 실패한 해외직구 셔츠 두 개였다. 사이즈를 잘못 선택해서 어린아이가 입는 옷을 산 것이다. 입지 않은 새 옷이라 설명과 사진을 올렸더니, 갖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서 픽업 시간이 정해지면 미리 알려 달라고 당부를 했다. 그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몇 시간씩 있다가 도착 5분 전에 문자를 했다. 주말이라 나는 외출을 할 상태도 아니었고, 게다가 가족과 영상 통화 중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고 준비도 안된 채 나갔다. 약속 장소로 가니 어떤 아주머니가 전화기로 통화를 하며 겨우 눈길 한 번 주더니, "손녀!"라고 두 마디 했다. 그게 다였다. 만났을 때, "안녕하세요?" 그리고 물건을 건네고 "안녕히 가세요!"라는 인사는 나만의 독백이었다. 이후 그 구매자는 채팅룸에 다시 들어와서, 손녀에게 줄 옷이라는 것과 함께 당신의 신상과 가족 정보를 나에게 공개하며, 나의 신상을 계속 고 있었다. 내가 당신의 딸과 나이가 비슷하겠고, 둘이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고, 손자 손녀가 몇 살이고 등등. 친절하게 그렇지만 선을 그으며 몇 번 답을 해주다가 나중에는 지쳐서 채팅방을 나와 버렸다. 가까운 거리에 산다고, 물건 때문에 얼굴 한 번 봤다고, 타인에게 나의 신상을 다 밝힐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옷 거래는 아이 옷장을 정리하다가 나온 첩첩산중 아니 여러 개의 산더미처럼 쌓인 옷 중에서 내가 온라인으로 구매했지만, 사이즈가 안 맞아 아이에게 강제로 떠넘긴, 아래위 속옷 각각 6개가, 아이의 눈길 한 번 받지 못하고 대로 있어서, 그 옷들의 다음 주인을 찾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도 왕의 선택을 받지 못한 궁녀들의 신세가 그랬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와이어 없는 브라 6개만 사진을 찍어 올렸다. 제품 설명과 함께 "여성분에게만 드립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얼마나 안 있어 곧 연락이 왔고, 나는 '팬티 6개도 같이 드릴까요?'라고 물었더니, 그것도 같이 달라고 했다. 그분을 만나러 가는 길에, 우연히 동네 아이들을 만났다. 딸보다 살짝 나이가 어린, 그러니까 딸의 옷을 입을 수 있는 아이들이었다. 입을 수 없지만 버릴 수 없는 속옷 세트를 가지러 온 사람에게 물건을 건네고 오면서 아이들을 아파트로 데려왔다. 당연 아이들 부모님 허락을 받고서 말이다. 아이 한 명은 두 상자 분량, 그리고 다른 아이 한 명은 한 상자 분량을 순식간에 골라 가지고 갔다. 그래도 한 상자 분량이 남았다. 어쩔 수 없이 또 당근 앱에 올렸다. 이윽고 어떤 분에게 연락이 왔다. 내일 픽업하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큼직한 소파 쿠션 같은 인형 두 개를 가지러 온 사람을 만났다. 그분은 약속 시간보다 빨리 나타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지만, 나를 한 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큰 비닐봉지에 인형을 두 개나 넣어 들고 있었는데 어떻게 모르셨을까? 그분은 인형들을 건네받고 자전거 앞 바구니에 넣으셨다. 아니 건네받기 전에 나에게 스타킹을 먼저 건네셨다. 난감했다. 싫다고 거절할 수도 없고, 그냥 받으면 짐이 하나 더 늘 것이니 말이다. 암튼 감사하다고 받아 와서는 마지막 남은 아이 옷상자에 넣었다. (솔직히 받아 온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준 행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아이의 마지막 옷상자를 전달하고 주말 당근 상거래를 마치려는데, 샤워를 하는 중에 또 당근에서 알람이 와 있었다. 누군가 벽시계를 사겠다고 하길래 언제 픽업하시겠냐고 물었더니, 이틀 후에나 가능하단다. 주말에 이렇게 많이 거래를 하지 않았다면, 그중에 절반 정도는 다른 사람의 편의를 위해 내 시간을 손해보지 않았다면, 그러자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 남의 시간에 맞춰 무조건 기다려 주고 싶지 않았다. 그때까지 안 팔리고 있으면 이틀 후에 보자고 했더니, 예약을 하면 그때 살 텐데 어쩌고 저쩌고 하더니 없던 일로 하잖다. 그 채팅방도 나오고 말았다.


이번 주말 당근에서 총 7건의 무료 나눔  거래를 하면서 느낀 점은 이렇다:

1. 사람들이 참 다양하다.

2. 감사함을 느끼고 표현하는 정도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 보인다.

3. 자신이 원하는 걸,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갖지 못했을 때 보이는 그 사람의 태도에서 그 사람의 성숙도가 보인다.

4. 구매자가 거래하고 싶은 사람과 거래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듯이 판매자 또한 그렇다.

5. 공짜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냄비와 같다. 요란하게 끓고, 빨리 식는다.

6. 사람들은 본시 이기적인 동물이다. 남의 시간에 대한 배려가 없다.


거금 들여 산 물건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남에게 주었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안 할 때 진심 서운했다. 남의 시간 기껏 맞춰줬더니, 번개처럼 갑자기 나타나 "왔어요!" 할 때, 짜증스러웠다. 무료 나눔이라는 좋은 행위 뒤에 몰려오는 인간에 대한 회의가 나를 더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왜 이렇게 비관적인가?'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 몇 시간 전 아이의 마지막 옷 한 상자를 가지고 가셨던 분에게서 "입혀 봤더니 옷이 잘 맞아요."라는 문자가 왔다. 나는 속도 없이 또 채팅방에서 옷이니, 미니멀리즘이니, 선물이니, 쇼핑이니 하는 싱거운 소리를 하며 오늘 처음 만난 그 사람과 한참을 떠들다가 나중에는 전번 교환까지 했다. 이번 주말 당근 하다가 당이 다 떨어져 내가 결단력을 상실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의 그 무언가가 내 맘속에 꼭꼭 숨겨진 한 톨의 낙천주의를 끌어낸 걸까? 전자면 어떻고 후자면 또 어떠할까? 어차피 매 순간이 도박이지 않은가!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과의 전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