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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Jun 13. 2021

호텔 같은 아파트의 부작용

이사 이후 세 번째 주말이었지만, 중고 거래를 하거나 쓰레기를 비우는 목적 이외에는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굳이 코로나 때문은 아니고 집안에서의 생활이 너무 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이사를 한 첫 번째 주말에는 물론 짐 정리로 정신없이 바빴다. 두 번째 주말에는 짧은 산책을 한 번 다녀왔다. 그리고 여름휴가에 들어선 세 번째 주말에는 그 짧은 산책조차 하지 않았다.


집 안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너무 좋다. 전망의 3분의 1일은 다른 집과 아파트들이고, 또 3분의 1은 적당히 멀지 않은 산, 나머지 3분의 1은 하늘이다. 예전에 나무 밑에서 보는 하늘 한 점이 좋아서 아주 가끔 등산을 했었다. 집에서 보이는 그 산은 높아도 너무 높다. 올라가고 싶은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한눈 가득 들어오는 하늘이 있으니, 뭐 어딜 딱히 가고 싶다는 소망도 없다. 그리고 남북으로 난 창들을 차례로 내다보면 한눈에 들어오는 이 동네 저 동네의 풍경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재미에 푹 빠져서 산책을 하고 싶다는 맘조차 생기질 않는다. 그냥 산책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는 약간의 자책감과 이렇게 또 하루가 가 버렸다는 옅은 허망함이 있을 뿐이다.


풍경을 감상하고, 이 동네 저 동네 내려다 보고, 그동안 못 봤던 티브이도 좀 보고 하면 금세 하루가 가 버린다. 휴가라고 평소에 못 하는 낮잠도 실컷 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배달 음식을 주문한다. 너무도 단조로운 일상이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늦게 잠자리에 들 때쯤이면, 약간 현기증이 나는 듯도 하다. 하루 종일 높은 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왠지 모르게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바다에 떠 있는 크루즈 생활이 아니고,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비행 생활 같다.


여기는 펜트 하우스 치고는 규모도 아담하고, 높이도 그다지 높은 편은 아니다. 이 도시에서 지난 10년간 사는 동안 크고 작은 아파트를 거쳤다. 57평에서 60평에 10평 다락이 딸린 펜트 하우스로 갔었고, 그다음 54평을 거쳐 마지막 있었던 32평의 그곳까지. 넓은 곳에 살다가 평수 다이어트를 하고 그곳으로 이사를 간 후 짐을 버리고 또 버려도 이사 나올 때까지 내 몸은 자꾸 여기저기에 부딪혔다. 화장실 나오다가 문에 부딪히고, 옷 갈아입다가 옷장에 부딪히고 등등... 한편 예전에 살았던 펜트하우스의 경치는 주로 다른 아파트들과 도로변이었다. 여름에는 너무 더웠고 겨울에는 너무 추웠다. 경매로 집을 사재기했던 집주인은 그 아파트 단지에만 아파트가 일곱 채 있었지만 만 원 한 장도 벌벌 뜨는 하우스 푸어였다. 그 집주인하고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대면해야 했던 게 유쾌하지 않았다. 그다음 갔었던 아파트 역시 집주인이 그 아파트 단지에 아파트가 이십 채 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사람의 경우에는 아파트를 산 후 그 아파트로 대출을 받아 다음 아파트를 사고, 다음 아파트로 대출을 받아 그다음 아파트를 사는 식으로 아파트 개수를 늘린 듯했다. 그런데 부동산 정책이 바뀌고 예전의 집주인들은 어떻게들 살고 있나 모르겠다. (하하하... 일 가구 일 주택자가 일 가구 다 주택자들을 걱정하고 있다.)


이곳은 옆집이 없는 펜트 하우스라 고요하다. 소음이라고는 밤늦은 시각 아파트 단지 옆의 주택에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그리고 큰길에서 들리는 미친 오토바이 엔진 소리 정도다. 소음이 들리지 않을 때는 고요하다 못해 적막할 정도다. 시공을 초월한 듯한 이 몽롱한 상태에서 나는 종일을 보낸다. 우리 집의 유일한 방문객들은 택배 기사와 배달 음식 기사 정도다. 그것마저 비대면 거래라 그냥 문 앞에 물건이나 음식을 놓고 바로 떠난다. 그래도 어쩐지 자꾸 주문을 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 집 대문은 너무 쓸쓸할 것이다. (내가 이런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려면 퇴직하기 전에 돈을 많이 모아 두어야 할 것 같다.)


이번에는 대출 액수가 적다 보니 매달 내어야 하는 대출금 역시 아주 착하다. 남편과 힘을 합치면 앞으로 일 년 안에 대출금을 모두 상환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쩜 혼자서도 가능할 것 같은데, 남편에게도 기여하는데서 오는 자부심을 느끼게 하고 싶다.) 아이들 대학 공부를 다 시키려면 앞으로 7년은 더 걸릴 듯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다. 우리 가족은 앞으로 이곳에서 얼마나 오래 살게 될지 모르겠다. 지금으로선 퇴직 후에도 계속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멋진 한옥을 볼 때마다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개 짖는 소리 사이로 들려온 자동차 급정거 소리가 나의 신경을 잠시 분산시켰다.) 한옥은 내 집이 아니라 예뻐 보이는 걸까? 내 인생에도 한옥에서 살 기회가 있을까? 만약 끝끝내 한옥을 소유하지 못한다 해도, 그냥 바라만 보아도 행복할 것 같다. 우리 집 저만치에 있는 호텔이 전혀 부럽지 않은 이 아담한 펜트 하우스에서, 종일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몽롱하게 하루를 보내면서도 오랫동안 나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호텔 같은 아파트의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해 조만간 게으른 운동이라도 시도해 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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