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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Jul 20. 2021

혼자서 휴가 이백 프로 즐기기

휴가로부터의 휴가

나는 직장에서 일 년에 10개월 정도 몰아서 피 터지게 일하고, 해마다 2달 동안 휴가를 받는다. 학업과 직장 때문에 떨어져 있는 나머지 반쪽 가족을 만나러 미국으로 온 지 3주가 지나고 가족과 보내는 휴가의 마지막 한 주를 시작하는 날에 가족은 남편이 사는 데서 2시간 정도 떨어진 다른 주에 위치한 놀이 공원으로 떠나기 위해 아침부터 분주했다. 각자 개인적 사정으로 하필 온 가족은 전날 밤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아들은 한국에 있는 친구랑 채팅한다고 늦게까지 깨어 있었고, 딸은 비디오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남편과 나도 늦게 잠을 청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 두 시까지 깨어 있던 남편은 급기야 1층 거실로 잠자리를 옮기기에 이르렀고, 나도 오래간만에 혼자 침대를 다 차지하고 갈 지자로 뻗을 수 있어서 내심 좋았다.


놀이 공원이 문을 여는 시간은 오전 11시이기 때문에 나를 제외한 가족은 오전 9시에 집을 나섰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내가 억지로 따라다녔지만 막내가 고등학생이다 보니, 남편이 다 큰 아이 둘을 어떻게든 돌 볼 수 있을 거라 믿고 이번에는 내가 굳이 가지 않기로 했다. 놀이 기구를 이것저것 타고 노는 가족과는 달리 놀이 공원에서 보내는 하루는 나에게 참 곤혹스럽다. 하루 종일 땡볕에서 가족들을 기다려야 해서 신체적으로도 고달프고, 입장을 하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써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 손실도 크다. 내가 따라 간들 고작 놀이 기구 타는 가족들 짐이나 맡아 주는 정도인데 그곳에 보관함이 있기 때문에 짐 맡아줄 사람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과감히 셋이서 잘 다녀오라고 했다.


9시에 가족들을 보내고 바나나 하나를 먹었다. 그리고 끝내야 하는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읽고 싶어 읽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보니 계속 진도를 빼지 못하고 있었던 책이다. 책을 읽다가 지겨워질 때마다 집안일할 게 없나 이리저리 기웃거렸다. 전날 내가 낮잠이 들었을 때 남편이 집안일을 이것저것 했기 때문에 집은 대체적으로 잘 정돈돼 있었다. 나 혼자 집에 두고 놀러 가기찝찝했는지 남편은 집안의 카펫 청소에서부터 집 밖 정원 잔디 깎기까지 모조리 했다. 그리고 본인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나에게 열심히 알리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평소에 자연스럽게 집안일을 분담한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는 것은 극히 드물다. 어떤 때는 남편이 집안일을 다 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내가 다 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둘이 같이 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아무도 안 할 때도 있다.  내가 게으름을 피우고 남편이 집안일을 많이 했을 때 남편은 자신이 한 일을 쭈욱 나열한다. 그러면 나는 열심히 칭찬을 하거나 고맙다고 말을 한다. 그래야지 신이 나서 남편이 다음에 또 집안일을 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해 보면 칭찬에 인색한 나를 훈련시키기 위해 남편이 계획적으로 자신이 얼마나 일을 많이 했는지, 잘했는지에 대해서 강조하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 부부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서로를 훈련시키고 서로에게 길들여져 있다. 읽어야 하는 책에서 쉬는 시간을 갖기 위해 집안일을 애써 찾아보니, 맨 먼저 눈에 띈 것은 몇 개 안 되는 설거지였다. 설거지를 하기 전에는 옥수수를 찌고, 계란을 삶고도 모자라서 라면까지 근사하게 끓였다. 물론 그 많은 양의 음식을 점심시간 이전에 다 먹었다. 바나나 하나, 삶은 계란 한 개, 옥수수 한 개, 그리고 라면 한 그릇을 브런치로 먹은 것이다. 냉동실에 가개, 연어, 삼겹살, 닭다리 등 여러 가지 식재료가 있지만, 혼자서 거창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간단하게 라면에 핫도그와 만두를 넣고, 파와 실란트로를 고명으로 올렸다. 예전부터 MSG 알레르기가 있다는 건 알고 있어서 라면을 먹는 것이 다소 위험 부담이 있었다. 며칠 전부터는 라면을 끓일 때 수프를 넣기만 하면 벌써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재채기를 쉴 새 없이 해대며 힘겹게 끓여낸 라면이 그래도 맛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브런치를 먹고, 설거지를 하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다가 시간도 안돼서 또 책 읽기가 지겨워졌다. 내가 책과 씨름하는 동안 놀이 공원에 도착한 남편이 간간히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 주었다. 나는 책으로부터 휴식이 필요할 때마다 중간중간 소일거리를 찾아야 했다. 마침 빨래가 쌓여 있어서 빨래를 하기 시작했더니, 한 시간 간격으로 빨래를 세탁기에서 건조기로 옮기고, 또 세탁기를 채워 돌리고 하는 식으로 네 번의 사이클을 거쳤다. 책 읽다 중간중간 쉬는 시간이 필요할 때마다 빨래를 할 수 있어서 일거양득이었다. 사실 세 번만 해도 되는 일을 네 번 하게 된 것은 빨래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구석에 남편이 교묘하게 숨겨둔 빨래 더미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남편은 평소 집안일을 할 때 뭔가를 시작하는 건 잘하는데, 꼭 끝내야 한다는 의지는 없는 듯하다. 그래서 남편이 시작한 일을 내가 끝내는 경우가 있다. 게다가 남편이 거쳐간 서랍과 찬장들은 문이 열려있기 일쑤다. 그래서 습관처럼 열려 있는  찬장이나 서랍들을 내가 닫곤 한다. 빨래도 그랬다. 분명히 남편이 시작한 것 같은데, 다 끝내지 않은 빨래가 구석구석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오후 네 시경 가족이 놀이 공원에서 집으로 출발한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서둘러 읽던 책을 마치기 위해 책 읽기에 중했다. 한 시간 후에 책을 다 끝내고, 마지막 빨래를 세탁기에서 건조기로 옮기고, 샤워를 했다.


샤워가 채 끝나기도 전에 가족들이 집에 도착했다. 그날 나는 오래간만에 혼자만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읽어야 하는 책을 끝내고, 밀려 있던 빨래마저 다 할 수 있었다. 온 가족 식사를 걱정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티브이 앞에서 보낸 지난 3주간의 시간은 나름의 스트레스를 동반했다. 그 스트레스의 주원인은 그다지 생산적이지 못하게 하루를 보냈다는 자책휴가 중에도 다른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무의식 속의 강박관념인 것 같다. 그래서 철저히 나 혼자만을 돌보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끝낼 수 있었던 혼자 보낸 하루가 무척 행복했다. 나는 가끔씩 이렇게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음 날은 내가 리포트 초안을 쓸 수 있게 아들 출근하는 시간에 맞춰 남편이 딸을 데리고 외출을 하기로 했다. 남편은 예전부터 나의 개인적 시간과 공간을 존중할 줄 안다. 그런 그가 사랑스럽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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