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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Jul 21. 2021

하루 종일 리포트를 쓰다

요즘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꿈속에서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누군가가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크게 말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 황급히 눈을 떴다. 꿈을 꾸는 와중에도 죽지 않으려면 잠에서 깨어나는 방법이 있다는 걸 생각해낸 것이다. 옆에서 곤히 자고 있는 남편을 깨우지 않으려고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놓인 스마트 폰을 집어 들고, 온라인 중고 시장에 올라온 물건들을 보았다. 그중에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눈에 쏙 들어왔는데, 그 사진을 보기 전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가 그것들을 보자마자 순식간에 절대적으로 가져야 하는 물건들이 되어 버렸다. 판매자에게 비대면 택배 거래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응해 줘서 두 군데서 귀여운 장식품들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판매자들은 내가 미국에서 자신들과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시차 때문에 가끔은 중고거래에서 한국에 있는 판매자와 문자를 주고받는 게 쉽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한국 가면 당장 필요한 물건들을 이것저것 구해 두었다. 필요하다는 것도 극히 주관적인 기준이라서 누군가는 장식품과 식물이 왜 꼭 필요하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아기자기한 장식품과 푸르른 식물은 지친 나의 영혼에 위로가 될 것 같은 느낌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연어 꼬치를 오븐에 구워서 점심을 차려준 후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했다. 전날 계획한 대로 읽어야 했던 책을 다 마친 후에 리포트를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학원을 마친 게 벌써 몇 해가 지났기 때문에 아카데믹한 페이퍼를 쓰는 게 무척 어색하고 쉽지 않았다. 세 가지 에세이 주제에 대한 답을 적는 형식인데, 1) 책에서 소개된 아이디어 중 마음에 들었던 것, 2) 내용이 나의 전문분야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3) 저자의 의견 중에 내가 동의하기 힘든  것에 대해 각각 설명해야 했다. 일반적인 글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쉽게 쓰는데, 아카데믹 페이퍼이다 보니 형식과 내용이 모두 부자연스러웠다. 전에 대학원 리포트에서 쓰던 형식에 맞춰 적었더니, 교수의 최종 학위가 뭔지도 모르겠고, 타이틀 페이지와 참고 문헌까지 포함하니 장수도 제한 한도를 훌쩍 넘기고 말았다. 그렇다고 서론과 본론이 있는 글을 결론이 없이 마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담당 교수님께 이메일을 보냈다. 참고 문헌을 정리하는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저자가 몇 명인지, 참고 문헌의 종류가 뭔지, 출판 일자가 나와 있는지 없는지 등등 해당하는 조건을 찾아, 정확한 순서로 참고한 문헌을 하나하나 정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석사 과정을 공부할 때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일 마치고 집에 오면 밤늦게까지 대학원 숙제를 했고, 토요일은 하루 종일 리포트 작성을 했고, 일요일은 전날 쓴 리포트를 퇴고하고 나서, 다음날 직장에서 필요한 들을 준비해야 했다. 그때는 리포트도 엄청 길었다. 오늘 하루 짧은 리포트를 완성시킨다고 낑낑거리다가 문득 대학원 시절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하루도 못 쉬며 밤낮으로 일하던 생각이 났다. 정확하게는 석사 학위를 마친 19개월 동안이었다. 어떤 기술이든지 쓰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녹이 쓴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해가 질 무렵 남편이 쇼핑몰에서 등에 메는 쬐끄만 가방을 하나 사 와서 쑥 내밀길래, (하이 톤으로) 왜 이렇게 귀여운 것을 사 왔냐고 물었더니 딸과 남편이 그럴 줄 알았다며 깔깔 웃었다. 남편이 구해 온 오징어 튀김과 아보카도가 들어간 에그롤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리포트를 조금 더 붙들고 있다가 최종 퇴고는 다음날 하기로 하고 늦게 샤워를 했다. 침대에 누워 또 스마트 폰을 뒤적이고 있을 때 담당 교수님께 답장이 왔다. 리포트가 길어져도 상관없다는 말과 함께 가을에는 리포트 대신에 온라인으로 토론하는 방법을 도입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미리 알았더라면 녹슨 머리로 리포트 쓴다고 하루 종일 고생을 안 했을 텐데. 졸지에 새에게 잡혀 먹힌 일찍 일어난 벌레가 된 기분이 살짝 들었다. 교수님의  최종 학위에 대한 질문의 답은 없었다. 실수로 누락 한 건지, 알리고 싶지 않은 건지. 그 부분은 리포트 형식을 조금 벗어나서 창의적인 방법으로 대체해야겠다. 리포트에 Ph. D. 대신에 그냥 Professor로 쓰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 같다.


한국에 가면 15일간은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하기 때문에, 그전에 해야 할 일을 처리할 수 있어서 마음이 놓인다. 이 리포트를 마지막으로 당분간 자격증 갱신에 대한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나는 뭔가를 시작할 때보다는 뭔가를 끝마칠 때 행복지수가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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