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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Sep 26. 2021

너무도 가까운 천국과 지옥

주말을 시작하는 금요일 저녁이었다. 친구들과 늦게 볼링을 치고 싶다는 아이를 픽업해 가려고 퇴근 시간 이후에도 계속 일을 했다. 하나를 마치는데 두 시간은 족히 걸리는 온라인 교육을 그동안 짬짬이 해 왔지만, 아직 해야 할 게 두 개나 더 있었다. 온라인 교육을 겨우 마치고, 밀린 잔무도 다 처리하고, 직원들이 다 떠난 건물에 홀로 있고 싶지 않아서 볼링장 근처 주차장에서 아이를 기다리려고 했지만 볼링이 끝나려면 아직도 두어 시간 더 남아 있었다. 운전을 즐기지 않기에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집에 다녀오고 싶지도 않았다.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와 지인과 통화를 했다. 내가 가끔씩 통화하며 지내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지인은 퇴근 후에 티브이에서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소식을 뉴스로 보고 나에게 알려 주었다. 명절 연휴 이후에 갑자기 확진자 수가 많이 늘어났다고 한다. 지인과 한 시간 가량 수다를 떨다 보니 어느새 주차장으로 다가오고 있는 아이와 아이를 데려다주러 온 듯한 키 큰 남자아이가 슬쩍 보이더니 이내 사라졌다.


아이에게, 친구가 데려다주러 왔었냐고 물었더니 아이 왈, " 엄마가 다른 질문 하기 전에 분명히 말해 둘 게 있는데요. 그 친구는 게이예요!" 그렇게 아이와의 대화는 짧게 끝이 났다. 요즘에는 유행처럼 아이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널리 알리고, 게다가 이름까지 바꿔서 부르라며 주위 사람들을 종종 혼란스럽게 한다고 들어 알고는 있었다. 내가 너무 보수적인 걸까? 이제 겨우 열다섯 남짓 된 아이들이 어떻게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그렇게 확신할 수 있을까?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몸부림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튼 아이를 데려다준 키 큰 남자아이가 게이라니 뭐 특별히 둘의 관계에 대해 내가 신경 쓸 일은 없는 듯하다. 그래서 우스갯 소리로 그 남자애가 좋아하는 다른 남자애와 엮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하고 말았다.


주말 동안 한국에 들어 올 준비를 하느라 초조해하고 짜증스러워하는 남편을 달래는 일과 밀린 온갖 집안일을 하는 것 이외에도 업무에 필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여러 개 만들었다. 가끔씩 영감이 떠오려면 그침 없이 일을 하는 데다가 일이 끝날 때까지는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 스타일이다 보니 한 번 일을 시작하고 속도가 붙으면 일사천리로 일을 해결한다. 그리고 일을 마친 후에는 내가 한 일에 스스로 감동을 받기도 한다. 주말을 퍽 효율적으로 보냈지만 평소 마시지 않는 커피를 세 잔이나 마신 탓인지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요새 종교의식처럼 지키고 있는 일요일 오후 낮잠을 자고도 소용이 없었다. 이번 주 주말에 하려고 했던 일중에 유일하게 하지 못한 산책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나갔다 오면 될 일을 망설이는 사이에 벌써 산책 마치고 왔겠다.' 집을 나서며 손에는 쓰레기를 잔뜩 집어 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배달 아저씨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분리수거를 하고, 드디어 산책을 시작했다. 강과 산이 맞닿은 산책지에 가려면 신호등을 여러 개 건너야 했다. 산책지에 다다르니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북적거리는 산책로가 꼭 지옥을 연상시켰다.


사람들을 피해 한참을 걸으니 강가에 꽃들이 수북이 핀 장소가 나왔다. 홀로 그곳을 걸으니 어느새 천국에 온 기분이었다. 쏟아지는 물줄기와 우뚝 쏟은 산을 바라보며 뒤에는 흐트러지게 핀 꽃을 배경으로 두고 시원한 물소리와 바람 소리를 동시에 듣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일주일의 피로를 쏴악 날려 준다. 너무도 가까운 곳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 어쩌면 천국과 지옥은 특정 공간이 아니라 나의 심리나 정서 상태가 아닐까 싶다. 내가 행복한 순간이 천국이고 내가 괴로운 순간이 지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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