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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Nov 26. 2021

세상에서 가장 게으른 캠핑

오랜만에 나흘간 휴가를 받았다. 휴가 시작 전날 설레는 마음에 잠도 설치고, 일이 끝나자마자 새로 뽑은 SUV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이번 휴가는 캠핑을 하기로 했다. 캠핑을 간다고 특별한 짐을 챙기지도 않았고, 손에 든 것은 텐트와 간단한 침구가 전부였다.


남편에게 낭만적인 휴가를 약속하고 캠핑지에 도착한 후 텐트 치는 것을 도움받았다. 텐트 속은 나름 아늑했다. 이불을 깔고 덮고 베개를 두 개 놓으니 내부는 그럴싸하게 꾸며졌다. 텐트 밖에 있는 나무들이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쉬러 와서 평소에도 하지 않는 요리를 할 수 없으니, 전화기로 주문을 했다. 남편은 김치찌개를 나는 제육볶음을 마지막 한 술까지 맛있게 먹었다. 저녁을 먹었으니 잠들기 전에 영화를 한 편 보기로 했다. 텐트장에 있는 거대한 티브이가 텐트 입구의 문을 열면 바로 보였다. 리모컨으로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만 하면 되었다. 한국 좀비 영화를 선택하고 한참 보고 있는데 주위가 너무 조용했다. 영화가 재미있냐고 물었더니, 남편은 "응" 대답만 하고 벌써 잠이 든 듯했다. 영화가 중간쯤에 이르니 어딘지 낯익었다. 분명히 전에 본 영화였다. 어쩔 수 없이 영화 보는 것을 중단하고, 나도 일찍 잠이 들었다.


몇 시쯤이었을까? 딱딱한 바닥에 누우니 허리가 아프다며 남편은 도저히 텐트에서 잘 수가 없다며 텐트를 떠나 버렸다. 떠나가는 남편에게 두꺼운 이불을 챙겨 주었더니 새벽에 텐트 속에서 이불도 없이 너무 추워 일찍 잠을 깨고 말았다. 불을 켜고 스마트 폰으로 이것저것 검색을 하고 놀았더니, 전날 밤 텐트를 떠난 것이 미안했는지, 남편이 요리를 해 주었다. 배 불리 먹었더니 또 졸렸다. 텐트 밖에서 나뭇잎 그림자가 비칠 때까지 하염없이 잤다.  한나절을 잠으로 다 보낸 게 도대체 얼마만인가? 남편은 옆에서 계속 영화를 본 듯했다. 저녁은 간편하게 시켜 먹기로 했다. 양념 통닭과 도시락을 시켜 또 배부르게 먹었다. 밥을 먹고 또 영화를 보았다. 이번에는 잠들지 않고 끝까지 보았다. 남편은 텐트 바닥에 좀 더 두꺼운 요를 깔고 잠을 자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몇 시간쯤 후, 허리가 너무 아프다며 또 이불까지 챙겨서 텐트를 떠났다. 아마도 이불을 가지고 가면 내가 포기하고 따라나설 거라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쉽게 캠핑을 포기할 수 없었다. 텐트 속에서 보내는 새벽은 너무도 쌀쌀했다. 불을 켜고 텐트의 천정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마치 실존 체험을 하는 것 같았다.


날이 샌 후 남편은 앓는 소리를 내며 캠프장으로 돌아와서, 매우 거칠게 커피를 타서 마시고 있다. 이 캠핑장에서 휴가를 다 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캠핑을 둘이 왔는지 혼자 왔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다. 곤히 자고 있는 아이들을 깨워 이것저것 일을 처리한 후 다시 캠핑장으로 돌아와야겠다. 거실 한 복판에 놓인 난방 텐트가 너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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