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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Jan 28. 2022

24시간 보호 관찰 대상자가 되었다

위장약을 먹은 시간이 언제였더라? 위장약을 먹고 30분 후에 죽을 먹을 수 있고, 죽을 먹으면 3시간 동안은 잠들 수 없다. 마지막으로 밥을 먹은 건 세 밤 전 몇 시간을 운전해서 도착한 호텔에서였다. 주문한 찐만두 대신 도착한 군만두의 속만 파서 먹었다. 그리고 56시간이 흘렀다. 위장약을 먹고도 속이 쓰려 오는 걸 보니 분명 배가 고픈 것이리라.


수면 마취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대장과 위장에서 각각 몇 개의 용종을 제거했고 떼어낸 용종은 조직검사를 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 전날 여러 가지 검사를 받았는데, 그중에 재검이었던 하나는 무사히 통과했다. 수술 준비를 위해 받았던 세 가지 다른 검사도 모두 정상이었다. 이제 기다리는 결과는 두 개. 남은 검사는 한 개. 최근 들어 오른쪽 팔다리가 너무 아픈데 아마도 정형외과에도 가 봐야 할 것 같다.


어제 대장내시경과 위내시경 시술을 한 의료진은 정말 다정 다감했다. 집이 전라도라는 간호사는 나를 살갑게 대해 주었다. 이런저런 주의 사항을 듣고, 위장과 대장 내시경 시술이 끝난 후에 (내가 일하는 ) 직장으로 연락을 했다. 수면 마취 후에 24시간 동안 집에서 쉬라는 의사의 권고를 받아서 병가를 연장해야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목욕을 한 후 컴퓨터 앞에 앉았다. 병가 신청서와 업무에 관련된 보고서를 간단히 작성해야 했다.


집에 온 이후부터 자꾸 기침과 재채기가 났다. 새벽 다섯 시 이십오 분. 너무 피곤하지만 누울 수가 없다. 이 와중에 봉지에 든 닭죽을 맛있게 먹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한 달 전쯤 플러스에서 몇 개 사두었는데 그동안은 먹을 일이 없었다. 실온의 닭죽을 그대로 먹고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우유가 좀 차게 느껴졌지만 맛있게 마셨다. 수술 전 코로나 검사를 받고 결과를 기다릴 때 나는 이미 알았다. 죽지 않은 미각과 기가 막히게 정확한 후각으로 볼 때 결과는 음성임에 틀림없었다.


타지에서 이틀 밤을 보낸 호텔은 너무 삭막했다. 더블베드가 있어서 남편과 각각 침대를 하나씩 쓸 수 있어서 좋았다. 호텔 이불에서 나는 표백제 냄새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결국 호텔 이불 위에 가지고 간 작은 이불 여러 개를 포개서 덮었다. 호텔 방에서는 히터 기계음이 30초에 한 번씩 덜컹거렸다. 둘째 날에는 자기 전에 결국 귀마개를 해야 했다. 이상하게 방금 집에서도 덜컹 거리는 소리가 들리길래 가 보았더니 둘째 아이의 침대 옆 창문이 열려 있다. 보일러도 틀지 않은 방에 창문까지 열고 자는 건 도대체 뭐지? 첫째 아이도 간혹 한 겨울에 창문을 열어젖히고 잔다.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블라인드가 덜컹거리는 소리를 낸다. 마치 나에게 애들이 얼어 죽기 전에 빨리 와서 창문을 닫으라는 경보음 같다.


24시간 보호 관찰자 신분으로 나는 나를 먹이고, 둘째 방 창문을 닫고, 삼일 간 방치돼서 콩나물이 청국장 콩처럼 변해버린 콩나물 재배기를 깨끗이 씻어서 다시 재배를 시작했다. 곧 아이를 깨워서 학교에 보낼 시간이다. 가족들이 학교와 직장으로 각각 떠나면 나는 다시 잠자리에 들면 된다. 24시간 나를 보호 관찰해 줄 사람은 없다. 그래도 쉴 수 있음에 감사한다.


대장 내시경에서 필요한 약물 복용을 견디고, 전날 수많은 검사와 테스트와 상담을 견디고, 마침내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수면 마취를 기다릴 때 황당하게도 나는 무척 행복했다.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고, 시술이 잘 못 될 수도 있지만, 평일 침대에 누워서 잘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시술 중 의료진들의 대화가 조금씩 들리는 듯했고, 시술 후 마취가 풀리기를 기다리는 중 간호사가 왔다 갔다 하며 하는 말도 살짝살짝 들렸지만, 빨리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오래 자고 싶었다.


비록 24시간 나를 보호 관찰해 줄 사람은 없지만, 평일 집에서 이렇게 쉴 수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오늘은 따뜻한 바닥에 누워서 계속 자고 싶다. 빨리 아침 여덟 시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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