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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Jun 19. 2022

고향 땅을 다시 밟다

우리 가족이 고향을 떠난 지는 삼십 년도 더 되었다. 십일 년 전 귀국 후 고향을 방문했을 때는 어린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동네 분을 한 분 만나 잠시 안부도 나누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 집 터와 밭의 형태를 어느 정도 알아볼 수 있었다. 집은 무너지고 터만 남았지만, 빈 터가 우리 집과 밭이 있던 곳을 제법 선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리고 한 오 년 후 고향을 다시 찾았을 때에는 우리 집 터와 밭이 식당과 건축 자재 같은 것을 쌓아 둔 땅이어서 예전의 집터와 땅을 알아볼 수 없게 변해 있었다. 식당으로 변해 버린 예전 우리 부모님의 땅을 보고 속상했었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 고향을 방문했을 때는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오 년이 지났다. 고향으로 다시 가 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흐르는 세월 속에 정처 없이 떠밀려 가는 내 삶에 대해 잠시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누구를 만난다 거나 전에 알지 못했던 뭐 새로운 것을 알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곳을 기억하고 싶었다. 내가 얼마나 먼 길을 힘들게 왔는지 잊고 싶지 않았다. 내가 실패할 수 없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다.

 

이번에는 친구도 아이들도 동행하지 않고 남편과 나뿐이었다. 두 시간 반 동안 고속도로를 달려 간 고향에는 우리를 반겨주는 이 하나 없었다. 귀국 후 두 번째 방문에서 이미 마을에 남아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건 알고 있었기에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식당으로 변해버린 부모님의 집터와 땅을 망연히 쳐다보았다. 그 식당의 주요리가 하필 보신탕이라 여전히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왜 하필 개고기란 말인가?!) 아니면 들어가서 밥도 먹고, 기회가 되면 이야기보따리도 풀고, 내가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낸 그곳의 새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도 보았을 텐데 말이다.


내 기억 속에 우리 부모님의 땅은 그 동네에서 제법 컸었다. 과수원 사이로 깊은 고랑이 흐르고, 과수원 위쪽에는 큰 밭이 있었다. 고랑은 없어지고, 그곳은 식당과 건축 자재를 쌓은 곳, 그리고 풀이 무성하게 자란 잡초밭이 있었다. 다시 보니 그리 큰 곳이 아니었다. 아주 길게 느껴졌던 동네 입구에서 우리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이제 새까만 아스팔트가 놓여 있는데 차가 하나 겨우 들어갈 넓이다. 예전에 고향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내가 다닌 초등학교가 너무 작아서 놀랐을 때처럼 나의 기억을 의심하게 되었다. 왜 어릴 적에 그렇게 크고 넓게 느껴졌던 곳이 사실은 이렇게 작을까? 나의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항상 올려다보아야 했던 작은 아이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원래 보이는 것일까?


고향 집 바로 옆에 담장을 두르고 있는 육군 부대에 가 보고 싶다고 남편에게 떼를 써 보았지만 남편은 갈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예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던 동네 아이들놀이터였는데, 갈 수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이제는 고인이 되어 버린 두 살 터울의 오빠가 입학하고 두 달도 채 못 다닌 농업 고등학교는 항공 고등학교가 되어 있었다. 그곳을 지나며 만약 오빠가 농고를 졸업했더라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고향 동네 구경을 마치고 읍내로 나와 늦은 점심을 먹을 만한 데를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데가 없었다. 운이 좋게도 작은 베트남 식당이 보여 들어갔다. 식당에는 세 테이블 가량 손님이 있었는데, 그중 일행으로 보이는 두 테이블이 식사 내내 유난히 시끄러웠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모여서 한국말로 이야기하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도 크고 시끄럽게 들릴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베트남 특유의 콧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가 유독 귀에 꽂히는 이유는 아마도 내가 못 알아 들어서 인 것 같았다. 그러니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에게는 한국어가 시끄럽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장터에 가서 기웃거렸다. 친정집도 없으니, 고향에 온 김에 그래도 너무 서운하지는 않게 뭐 하나라도 기념품(?)으로 가지고 가고 싶었다. 이곳을 다시 찾을 때까지는 아마도 또 한 오 년은 걸릴 것이다. 제일 먼저 산 것은 겉절이 김치였다. 보기에는 북쪽 지방 음식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고향의 김치 맛은 어떨까 궁금했다. 그리고 기름집에서 만 오천 원을 주고 들기름 하나를 샀다. 주인아주머니께서 들기름 병을 나에게 건넬 때 주인아저씨는 남편의 손에 껍질을 깐 삶은 감자를 쥐어 주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 후 골목에서 빠져나오기 무섭게 식당에서 이미 국수에 밥까지 먹은 나에게 남편은 감자까지 내밀었다. 어릴 적 감자와 옥수수를 물리도록 먹었는데, 다시 찾은 고향에서 결국 감자를 먹게 될 줄이야. 내친김에 친정 엄마가 좋아하시던 쑥떡도 샀다. 내가 어릴 적 엄마는 떡과 밀가루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쑥개떡 (쑥버물이) 가끔 만드셨다. 어릴 적 다닌 초등학교에 잠시 들렀는데, 교문에 1906년 개교했다고 적혀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도 이 학교가 있었다니... 그럼 대체 내가 몇 기 졸업생이란 말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속도로 길가에 팔고 있는 찰옥수수를 한 봉지 샀다. 감자도 먹었으니 옥수수도 먹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오 년 만에 다시 찾은 고향은 왕복 다섯 시간의 운전과 고향 집터 둘러보기, 점심 먹기, 장보기, 초등학교에 잠시 들르기로 막을 내렸다. 무의미한 인생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떠난 고향 방문의 목적은 달성되었는가? 나는 진정 무엇을 기대하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그곳을 갔던가? 긴 휴가 기간 동안 초심을 찾기 위한 나의 첫걸음을 디뎠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집에 도착해 삶은 옥수수를 아이들에게 줬더니 첫째는 다 먹고 둘째는 반 정도 먹다가 말았다. 남편은 다섯 시간 운전으로 허리가 아프다고 끙끙댔는데 그래도 거기까지 같이 가 준 게 참 고마웠다. 고향에 갔을 때 우리 동네와 윗동네 사이에 있던 저수지가 안 보여서 윗동네 할머니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저수지를 덮고 그 위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저수지도 없어지고, 산도 깎이고, 동네 사람들과 집은 모두 사라지고 낯선 곳이 되었지만, 그래도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김혜자 할머니가 찾아간 고향이 사라지고 저수지로 변한 것보다는 덜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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