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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Jun 29. 2022

배부른 돼지의 절규

휴가가 시작된 지 삼 주 가량 되었다. 무지하게 살이 쪘다는 것 외에는 삼 주 동안 도대체 무얼 했는지 모르겠다. 정녕 나의 휴가는 이렇게 소리 없이 죽어 버리는 건가?


외곽에 있는 식당에서 열리는 남편 직장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택시를 탔다. 야구를 좋아하는 택시 기사 아저씨가 이런저런 말을 걸더니 차근차근 대답하는 나에게 신사임당 같다고 하신다. (최근 나의 행보는 정녕 현모양처다.) 그러고 보니 휴가 시작하고 남편 직장 모임에 끌려가는 건 두 번째 있는 일이다. 남편 직장은 인사 교체가 빈번한 곳으로 내가 하는 일과는 업종도 달라서 불편하다. 일 년에 한 번 얼굴 볼까 말까 하는 사람들 사이에 어색하게 앉아서 사모 짓을 할 위인도 못 돼서 그런 자리에 가면 적당히 친절한 컨셉으로 있다가 돌아오기 일쑤다.


남편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멀뚱 거리고 있는 나를 아량곳 않고 바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다니더니 테이블에서 내가 온몸에 냄새가 절도록 열심히 구워 놓은  고기를 한 점 먹을 새도 없이 온 방을 헤집고 다니며 열심히 사교 중이다. 덕분에 나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이들은 호강했다. (하필 낮에 치과에 다녀와서 나는 고기를 다 구운 다음 제일 작은 조각 한 점 겨우 먹었다. 그간 삼겹살이 너무너무 먹고 싶었는데 그날은 먹을 복이 없었나 보다.) 남편은 술도 참 잘 마셨다. 그곳 모인 사람들 중에 아마도 술값을 제일 많이 냈을 거다. 나는 고기 한 점 먹고 물 한 모금 마셨는데, 알고 보니 남편은 식사 이 인분에 술 여섯 병을 계산했다. 밥은 둘 다 먹지도 했지만 술은 분명 남편 혼자서 최소 여섯 병은 마셨을 것이다. 회식비를 처음부터 걷는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다 내는 것도 아니라, 테이블마다 알아서 시켜 먹고 나가면서 자기가 먹은 만큼 계산을 하는 식이라 나중에 오차가 있다. 식사와 행사를 마치고 모든 계산이 다 끝나기 전에 식당 주인이 나에게 와서 총 이십이만 원이 부족하다고 하셨다. 이후 남편이 통 크게 밥값 술값을 낸 후 결국 계산은 잘 처리된 모양이었다.


식비 계산을 하고, 남편 회사 직원들이 다 자가용이나 택시를 타고 떠난 후, 정작 우리 택시를 부르려고 하니 남편의 상사 (그곳에서 가장 직급이 높은) 부부가 우리를 굳이 집까지 태워 준단다. 그동안 얼굴 한 번 안 비쳤다가 내가 모임에 나와 무척 반가운 눈치였다. 남편 상사의 부인과는 전에 같은 직장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구면이다. 전에 같이 일할 때 그녀의 모습과 남편 직장 모임에서 그녀의 모습은 많이 달랐다.  모임에서 그녀는 무척 사교적이고 적극적이었다. 내가 저 자리에 있게 된다면 나는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사모의 자리를 즐기는 걸까? 아니면 그냥 열심히 하는 걸까? 등등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소에 남편과 나의 일이 서로 얽히지 않도록 철저하게 공사 분리 정책을 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남편 회사 모임에 나가게 될 때는 구름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진다. 현모양처 이미지만 살짝 남겨두고 말이다. 그녀는 같이 커피 마시러 가자, 다음 회사 모임은 언제다, 부인들끼리 모여서 활동하자 등등 여러 가지 제안을 했고 나의 참여를 기대했다. 그렇지만 나는 남편이 꼭 같이 와달라는 모임 외에는 갈 의향이 없다. 남편 회사의 상사 밑에는 그의 오른팔과 왼팔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 남편이 있다. 그런데 앞으로 남편 상사의 두 팔 중에 한쪽을 담당할 사람이 낮에 새로 임명되었고 모임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남편보다 몇 년 전에 입사한 일본 남자로 두 돌이 안 된 아이가 있단다. 그의 아내도 일본인인데 친정이 하와이에 있어서 남편과 한국으로 오는 대신에 하와이에 남는 것을 선택했단다. 나중에 남편에게 들은 말로는 한국인이 일본인을 차별한다는 말을 듣고 부인이 한국에 오는 것을 두려워했단다. 그런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업무를 분담하게 될 그 사람은 아주 차분해 보였다. 저녁 식사 내내 그는 나를 자신의 동료 대하듯 꾸밈없이 친근하게 대해 주었다. 그의 부인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졌다.


그렇게 술을 퍼 마시고도 남편은 새벽에 일어나 출근을 했다. 딸 출근 시간 전에 피넛버터 젤리 토스트를 만들었다. (피넛 버터 젤리 샌드위치를 팬 토스트 하는 것이다. 왜 런 걸 먹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걸 만들어 달라며 짓는 아이의 환한 미소를 보면 거절할 수가 없다.) 아이들에게 아침을 해 먹이고, 설거지를 하고 손빨래와 세탁기 돌리기 그리고 산처럼 쌓인 택배 상자 등 재활용 쓰레기 정리를 마쳤더니 시간이 벌써 아침 열 시다. 그래도 아침나절에 집안일을 거의 다 마쳤다고 안도의 숨을 내 쉬는 찰나에 <아직 아침을 못 먹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 안 하고 놀면서 월급 따박따박 받고 편하게 지내면서 웬 넋두리냐라고 할 수 있겠지만,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딴 곳에서 여름휴가를 즐기고 있는 내 동료들을 생각하면 나는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낀다. 회사에서 직원 복지로 제공하는 해외여행 찬스를 쓰지도 못했고, 집안일하면서 거의 하루를 다 보내고, 치과나 병원 이외에는 가는 데가 없이, 자발적 외출이라고 해 봐야 봉사활동이 전부다. 무료하다. 너무 무료해서 혼자서 당일 여행이라도 하고 싶다. 서울에 있는 학교도 가 보고 싶고, 바다도 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들도 만나고 싶다. 서울의 학교는 텅 비었을 것이고, 바다는 사람들로 북적일 것이고, 내가 그리운 사람들은 나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현모양처의 역할은 잠시 내려놓고 나를 자유롭게 해 주고 싶다. 일 년을 기다려온 이번 여름휴가가 아닌가! 아이에게 어느 날 점심시간에 집에 왔는데 엄마가 없으면 혼자서 밥 챙겨 먹으라고 일러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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