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저녁. 최근 몇 달째 같이 운동을 하는 동료의 남편이 윗지방에서 내려오는 날, 동료가 같이 저녁 먹고 카드 게임을 하자고 했다. 마침 우리 집 양반은 윗지방에 출장을 가고 없는데, 부부 동반도 아니고 어색할 것 같아 다른 직장 동료와 함께 가려고 계획을 세웠더니, 그 사람은 또 하필 당일에 아프다고 펑크를 내 버린다. 나마저 펑크를 내버리면 서운해할 거 같아서 일 마치고 동료와 함께 먼저 체육관에서 운동을 한 후 동료 부부를 만나 저녁 식사를 했다. 동네 삼겹살 식당에서 열심히 고기를 구워 먹고, 식당 건너 마트에 들러서 화투와 간식거리를 산 후 동료의 집으로 향했다. 동료의 집 앞까지는 수십 번도 더 갔지만 집 안까지 가 본 건 처음이었다. 함께 산책을 다니곤 했던 동료의 강아지가 나를 격하게 반겼다. 백합이라는 이름의 암컷인데 전혀 여성스러움이라고는 없다. 개에게서 여성성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모한 짓인가? 백합은 분명 나에게서 나는 여러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옷을 갈 아 입은 후에도 나는 운동 후 땀 냄새, 삼겹살 구이 냄새에 두 달 만에 시작한 생리까지. (사실 동료가 만날 시간을 정확하게 알려줬으면 샤워를 하고 갈 수 있었을 것이다.) 동료의 남편은 화투를 쳐 본 적이 없어 기초 설명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놀이를 시작하는데 백합이 자꾸 내 다리 사이에 자신의 머리를 쳐 박았다. 게임을 몇 판 한 후 장거리 운전을 한 동료의 남편이 연신 하품을 해대길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 재미있지도 재미없지도 않은 불금을 보내고 집에 오니 우리 집 사춘기가 일찍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우리 집 청년은 일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외식 중이었다. 우리 집에서 가장 밝고 사교성이 좋았던 사춘기가 불 꺼진 방 이불속에 누워 있는 것을 보니 안쓰러웠다. 같이 영화를 보자고 해도 피곤하다며 거절했다. 다음날 청년이 콘택트렌즈를 하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나도 마침 다음 주에 무도회에 가려면 콘택트렌즈가 필요해서 같이 가기로 했다. 설날 연휴부터 머리를 하고 싶다고 하던 사춘기에게 같이 안경 가게 들렀다가 헤어숍에 가자고 했더니 머리를 망칠까 불안하다고 대신 쇼핑이나 하자고 했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땋아서 묶고 화장을 했다. 밀린 집안일을 하고, 밖에 나가려고 하는 바로 그때 사춘기가 말했다: " 나, 머리 하고 싶어요!" 짧은 시간 동안 몇 번씩 마음을 바꾸는 우리 집 사춘기 때문에 혈압이 오르락내리락했고 억지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 쉬어야 했다.
셋이서 재활용 쓰레기를 각각 하나씩 들고 내려가 버린 후 일렬로 서서 걸으니 다 큰 아이들이지만 기분이 묘했다. 골목길을 걸어 안경점에 도착하니 안경점 바로 앞에 어떤 할아버지가 느릿한 걸음으로 작은 개 한 마리를 쫓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약간 우스꽝스러웠는데 바로 옆이 육 차선 도로라 곧 위험한 상황이 생길 것 같아 같이 작은 개를 잡으로 뒤쫓았다. 작은 개는 계속 달아났고 곧 우려하던 일이 생기고 말았다. 작은 개가 육 차선 도로로 뛰어들었을 때 다행히 차들이 멈춰 서 주었고, 그중에는 심지어 경찰차도 있었지만 한 길에서 벌어진 소동을 외면하고 가 버렸다. 작은 개는 그 이후도 두 번 더 차도에 뛰어들었고 이러다 큰 일 나겠다 싶어서 내가 달려들어 강아지를 꽉 거머쥐었다. 할아버지는 개를 쫓다가 몇 번을 넘어지셨고 말씀도 어눌하여서 집이 어딘지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작은 개를 붙잡고 청년은 할아버지를 일으켜 세워 부축해서 안경점 코너를 돌아가니 전봇대에 강아지 줄이 매어져 있었고 줄에는 강아지 옷이 부착되어 있었다. 사실 개인지 강아지인지도 모르겠고, 암튼 엄청 작았다. 개가 달아나는 바람에 약이 제대로 오른 할아버지는 강아지 옷을 입히며 손바닥으로 강아지를 몇 번 후려치셨다. 할아버지 손바닥에는 좀 전에 넘어지실 때 난 상처가 여럿 있었다. 할아버지가 강아지 옷을 다 입히는 것을 보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눌한 말투로 할아버지가 연신 고맙다고 말씀하셨다. 갑자기 달아나는 개를 잡겠다고 <피곤한 오춘기, 무릎 아픈 청년, 그리고 우울한 사춘기>까지 한바탕 소동을 벌인 후 안경점에서 콘택트 렌즈를 샀다. 청년의 카드는 무슨 일인지 거절돼서 결국 이십 칠만 원을 오춘기의 카드로 계산했다. 콘택트 렌즈를 들고 청년은 집에 가고, 사춘기와 오춘기는 머리를 하러 갔다.
둘은 전에 이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른 적이 있는데 규모에 비해 직원이 여럿 있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예약하지 않은 손님이 꽤 많이 왔다. 원장은 손님은 잘 받지 않았고, 메인 스타일리스트 두 명 밑에 일 배우는 사람이 세 명 정도 되었다. 보아하니 스타일리스트는 커트를 담당했고, 펌이나 염색등은 수습생에게 일을 가르치면서 같이 했다. 내가 매직 파마를 하는 동안 그곳 직원들 중에 내 머리에 손대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계속 사람이 바뀌면서 약을 바르고, 머리를 감기고, 당기고, 드라이를 하니 만약 문제가 생기면 뭐 딱히 누구를 지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이라이트를 한 사춘기의 머리도 마찬가지였다. 좌우의 밝기 정도가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밝아진 머리색이 사춘기에게 잘 어울렸다. 나도 사실 하이라이트를 하고 싶었는데, 나이 든 사람과 같은 스타일을 하고 다니는 게 껄끄러운지 사춘기가 극구 말리는 통에 그냥 매직을 했다. 게다가 가벼운 머리를 하고 싶어 길이도 싹둑 잘랐다. 사실 길이가 길면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에 비용을 아끼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데 일주일 후 무도회에 간다는 생각이 든 건 스타일리스트가 머리를 한창 자르고 있을 때였다. 아차 싶었다. 인어 몸매의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컬을 넣고 싶었는데 머리가 너무 짧아졌다. 오춘기는 매 순간 너무 많은 일을 처리하며 정신없이 살다 보니, 가끔 중요한 일을 이렇게 얼렁뚱땅 넘기게 된다. 분명 오춘기의 감수성은 점점 메말라 가고 있다.
한껏 밝아진 사춘기의 머리와 가벼운 오춘기의 머리를 연신 유리창에 비춰 보며 둘은 분주히 걸었다. 사춘기는 그날 쇼핑까지 하고 싶단다. 둘은 걸어서 제법 큰 다이소에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서브웨이 샌드위치 가게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다이소에 들렀을 때는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는 물건들을 잔뜩 사서 각각 한 봉지씩 나눠 들어 집에 왔다. 외로운 사춘기와 피곤한 오춘기의 주말은 이렇게 분주하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