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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똥꽃 Sep 16. 2019

어떤 엄마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엄마가 존재한다. 어떤 사람은 각각의 아이에게 다른 종류의 엄마로 여겨질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엄마가 있다. 친엄마 밑에서 자란 사람도 있고 새엄마 혹은 조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도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엄마라는 존재를 모른 채 자란 사람도 있다. 물론 예외는 존재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어떤 엄마의 자식이면서 어떤 사람(들)의 엄마일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엄마라는 이름에는 상당한 무게감이 실려있다. 엄마라는 이름 만으로도 어떤 때는 벅차고 어떤 때는 죄의식을 느낄 것이다.


한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업적은 아마도 어떤 엄마였는지가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자의에 의해 혹은 타의에 의해 혹은 아무 생각 없이 어느 순간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만족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엄마라는 이름으로 인해 희로애락의 감정을 수 없이 경험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여기 일곱 아이를 키운 엄마가 있다. 그 아이들 중에 한 명은 자신이 낳지는 않았지만 아이가 백일이 된 이후부터 줄곧 키웠다. 그 뒤로 딸아이를 낳은 후에 처음으로 자신의 아들이 태어났다. 그녀가 아들을 낳았다는 그 뿌듯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아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을 갖고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잘 살고 있다. 그 아들 이후로도 여자에게서 아들 둘과 딸 셋이 더 태어났다. 그중 가장 예뻤던 딸아이는 안타깝게도 두 살이 되던 해에 원인 모를 병으로 죽고 말았다. 미인박명이라 그 아이는 그리 일찍 떠났을까? 아니면 일찍 떠나 버렸기에 그토록 예쁘게 느껴졌던 걸까?


가난한 살림에 많은 아이들은 그녀에게 너무도 큰 짐이었다. 집안을 다 말아먹은 망나니 남편은 집에 있을 때 보다 없을 때 더 도움이 되었다. 아니 그가 없을 때 그녀의 가족은 더 평화로웠다. 그로 인해 일곱 아이들의 생계는 그녀의 몫이었다. 배운 것 가진 것 없는 여자에게 유일하게 있는 것이라고는 줄줄이 딸린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절대적인 사명뿐이었다.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곱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사명을 다했지만,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엄마라는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녀의 자식들 대부분에게 그녀는 불쌍한 사람이지만 애틋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배우지 못하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엄마가 자신들을 배부르게 먹여 준 기억이 없는 자식들은 자라면서 그녀를 고마워하기보다는 원망했던 적이 더 많았을 것이다.


더 빨리 죽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안타까운 그녀의 남편이 쉰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낳지 않으려고 들이마신 간장 때문에 작게 태어난 막둥이마저 청년이 된 이후에 그녀는 예순셋에 일터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뇌출혈로 인해 두 번의 수술을 받은 후, 그녀는 병실 침대 위에서 길고 긴 세월을 보내고 있다. 안타깝게도 언젠가 그녀는 그곳에서 자신의 초라한 생을 마감할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멀다는 핑계로 그녀가 그들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핑계로 그녀의 유일한 업적인 자식들은 자주 찾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병실에 누워 있는 동안 자식 중 한 명을 잃었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자식이 죽었다는 사실을 아느냐 알지 못하느냐는 그녀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그녀는 오늘도 병실 침대 위에서 죽지 못해 살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지 조차 모른 채.


그렇게 두 아이를 먼저 보내고 여자는 막내 동생마저 떠나보냈지만 그것조차 알지 못한다. 막내 동생은 욕심도 많고 똑똑해서 부녀회장도 하고 했었는데, 아픈 데도 없다가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뜨지 못하고 너무 허무하게 가 버렸다. 그 여자 동생이 죽기 한 달 전인가 언니를 한 번 보러 가겠다고 병원에 전화했지만 끝내 언니를 못 보고 가 버렸다. 그 여자는 동생의 그죽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더 다행인지 모른다.


나는 그런 엄마로 살고 싶지 않다. 혼자만 희생하는 삶은 살지 않으리라. 하루를 살아도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누구에게도 죄책감을 주거나 느끼지 않으며,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떠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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