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에서 도보 삼십 분 이내 거리에 밤 열 시까지 운영하는 도서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이삼 주마다 세네 권씩의 책을 빌려다 읽고 있다. 주로 빌리는 책의 구성은 단편소설집 한 권, 장편소설 한 권, 에세이 한 권, 정신적이든 심적이든 약간의 에너지를 써서 읽어야 하는 한 권.
가벼운 마음으로 펼쳐 후다닥 이입했다가 금세 빠져나올 수 있는 책, 끝까지 흥미를 가지고 읽어야 하기에 부담이 없진 않지만 일단 한번 빠져들고 나면 충분히 그 기쁨을 즐길 수 있는 책, 어떤 리듬에서든 가볍게 들춰 읽다 내려놓기 쉬운 책, 그리고 서사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더 찬찬히 읽으며 곱씹어보아야 하는 책. 이 정도 조합이면 몸과 마음의 컨디션이 어떻든, 날씨나 시간이 어떻든 '영 읽을 책이 없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음, 책을 읽지 않는다고 누구도 뭐라 하지 않지만.
「9번의 길」, 「딸에 대하여」를 읽으며 깊은 인상을 받은 김혜진 작가의 「미애」도 좋았고, 올해 처음 알게 된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와 「길티 클럽: 호랑이 만지기」도 좋았다(후자가 특히). 202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차영은 작가의 「경고문 쓰는 여자」는 정말 재미있었다. 조금 질투가 날 만큼. 하필이면 조용한 도서관 창가 자리에 앉아 읽고 있던 터라, 소설 속 주인공이 나를 지켜보며 어떤 경고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진 않을까 상상하게 될 정도였다. (아마 그랬다면 나보다는 내 옆자리에서 독서대를 펴놓고 핸드폰을 보던 여자가 경고를 받았을 것이다.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소설 두 편과 그에 딸린 작가노트, 심사평을 완독하는 동안 그녀는 내내 입안에서 얼음을 달그락거리며 굴리고 깨먹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공공장소에서의 그 정도 소음에 부정적 평가를 내릴 생각이 전혀 없다.)
집 바로 근처에 있는 도서관은 긴 공사를 마치고 한 달 뒤쯤 재개관한다. 여기도 평일엔 밤 열 시까지 운영한다는데, 부디 지금 다니는 도서관만큼 재밌는 책이 많았으면 좋겠다.
2.
어떤 날들이 있었다.
그 어떤 날들의 시작점에,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를 대여했다. 이태원 참사 생존자 김초롱 씨가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쓴 책. 참사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들이 본 것들, 사회적 참사를 맞닥뜨린 이들에게 찾아온 트라우마의 형태와 그것을 극복하려 애쓴 흔적들이 담긴.
자신의 고통을 억누르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읽어내려가도 될까?
비양심적이거나 비윤리적이거나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일 아닐까?
그러나, 어쨌거나, 그런 날들이 있었고
서른 몇 번째 생일을 뜻깊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기부를 하기로 했다. 반 년 전쯤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생활동반자법의 제정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민우회에 기부했던 기억을 발판 삼아서. 어디에 기부를 하면 좋을까, 지금의 내가 가장 마음을 쏟고 있는 곳이 어디일까 고민하다가 트라우마 치유센터인 '사회적 협동조합 사람마음'에 기부하기로 했다. 매일을 큰 흔들림 없이, 내가 딛고 있는 세계가 안전하다는 믿음 하에 안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매월 소액이나마 두 군데의 단체에 정기후원을 하고 있고, 가끔 재난이 발생했을 때 일시후원을 하기도 하지만 이런 식의 기부는 뭐랄까,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내 양심의 가책을 조금 덜어내는 일에 더 가까운 것 같다. 할 수 있으니까, 할 수 있는 만큼만은 해야 하는 일. 물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마음가짐은 아니고, 조금 먹고 살 만해진 이후 꾸준히 정기후원을 해오고 있는 엄마에게 보고 배운 것이지만.
'이런 식의' 기부와 달리 결혼식과 생일에 한, '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한' 기부는 나를 분명히 기쁘게 한다.
일단 기념하고 싶은 날짜를 박은 기부증서라는 것을 받을 수 있으며(비록 이미지 파일일 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걸 자랑거리로 보여주기도 쉽고(속물적인 의미가 크긴 하지만, 어쨌거나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이나 기부 자체에 대해 인지/재고하게 하는 역할도 하므로) 활동가 분들에게 매우 따뜻한 환대(기부증서 발급이 '매우 가능'하며, '생존자뿐 아니라 활동가에게도 커다란 힘이 된다'는 말들)는 물론 기념일에 대한 진심어린 축하까지 받을 수 있다. 내가 보탠 마음에 비해 너무 큰 감사와 축하를 받는 것 같아 민망할 정도랄까.
(앗, 어쩌면 역시나 더 큰 기쁨은 더 큰 지출에서 오는 것일까…)
먹고 마시는 것 외엔 딱히 돈을 쓰는 데가 없는 사람 입장에서 이만큼의 금액으로 이만큼의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오랫동안 하고 있다. 나의 기부 소식을 듣고 좋은 일 했다고, 연대하며 살아가는 삶이 참 중요한 것 같다고 함께 뿌듯해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에 더더욱 감사했고.
사건은 사건이고, 결국 그걸 어떻게 소화시키느냐는 나의 몫.
나를 돌보는 것과 타인을, 세계를 돌보는 것이 그리 멀리 있지 않음을.
3.
사람들은 사랑을 오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심하게 구부러뜨리거나 질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요
나는 사랑을 사랑하기 시작했고
개인적입니다
언제나 좋은 맛이 나는 음식을 바라지는 않아요
맛이 없거나 입에 안 맞는 음식이 나올 수도 있다는 가정하에
사랑과의 잘못은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꽃을 떨어뜨린 줄기가 땅을 파고들어 열매를 맺는 것이 땅콩입니다
그것을 줄기로 치느냐 뿌리로 치느냐 관점의 차이는 있습니다
사랑은 계속해서 내 앞에서 헷갈려 하지만요
사랑이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난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은 이성적으로 나를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러기 떼의 숫자나 세고 돌아와도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감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번 생의 암호를 풀 수 없을 텐데
어떻게 이러고 삽니까
사랑이 후방에라도 있는 겁니까
「언젠가는 알게 될 모두의 것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 이병률 (2024, 문학과지성사)
어쩔 수 없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고르는 마음을 존중하고 싶다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 유선혜 (2024, 문학과 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