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문득, 얇은 유리잔을

by 이일리


하루에 물을 4L 가량 마시는 나는 침대에 누워 잠들기 직전까지, 그리고 잠에서 잠시 깰 때마다도 몇 번이고 목을 축이는 편이다. 이 때문에 내 침대 머리맡에는 언제나 '자리끼'가 있다. 원래는 평소 물컵으로 쓰는 이케아의 베르다겐 물컵을 쓰다가, 몸을 일으키지 않고도 물을 마시기 위해 자전거를 탈 때 쓰는 물통으로 바꿨다. 누워서도 물통을 누르기만 하면 물을 마실 수 있고, 만약 실수로 치더라도 물을 거의 흘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쓰는 자전거 물통은 CATCH UP이라는 문구로 '케찹'을 연상시켜 디자인한 제품이다. 매우 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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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물통의 장점은 베르다겐 물컵보다 담기는 물의 양이 많다는 것이다. 침대에 누워있다가 본격적으로 잠에 들기 전 물컵에 담긴 물이 반밖에 없으면 초조해지기 때문에 꼭 물을 새로 따라야 하는데, 자전거 물통은 기본적으로 용량이 크니 그럴 필요가 없다. 이 장점을 근거로로 어느날인가부터는 잠들기 전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통을 눌러가며 물을 쭉쭉 마시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입에 닿는 부분을 빼고 그냥 통째로 마시곤 했다.


그렇게 며칠이나 지났을까. 평소처럼 물통에 입을 대고 꿀꺽꿀꺽 물을 마시다가, 아주 갑작스럽게 불쾌한 감각이 들었다. 입술에 닿는, 정교하지 않은 마감의 두툼한 입구.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느껴지는 고무의 향. 그간 몰랐던 건 분명 아닌데, 그저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던 감각인데 유달리 불쾌했다.


그래서 바로 얇은 유리잔에 물을 담아 마셔봤다. 내가 가진 잔 중 아마도 가장 얇을 잘토의 리델 오 유리잔에. (아마 피노누아였던 거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난다) 날렵하지만 날카롭지는 않은 마감, 물 외에는 그 어떤 향도 나지 않는 멀끔함. 입술에 아주 가볍고 매끄럽게 닿는 감각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나는 바로 고무 물통을 찬장에 수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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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와인이나 약주, 맥주, 커피 등을 마실 때 어떤 잔에 담을지를 신경쓰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건 입술보다는 눈을 위한 것에 가까웠다. 이론상으로는 얇은 잔이 왜 좋은지를 알지만 실제로 그걸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날의 경험이 꽤 오래 머릿속에 남아있다. 고무 물통이 입에 닿았을 때 느낀 불쾌함과 함께.


그 날 이후로는 베르다겐 물컵과 비슷한 두께의 사백몇 미리짜리 유리 텀블러를 쓰는 중이다. (잘토 잔을 물잔으로 쓰기에는 나의 부주의함이 걱정되어서.) 예전과 다를 바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닐 것 같다. 수줍게 말해보자면, 얇은 유리잔을 내심 사랑하게 되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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