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과 우리집을 잇는 자리에 꽤 큰 시장이 있는 덕에 하루 한두 번은 꼭 시장에 간다. 출근길에는 복작복작한 사람 냄새를 느끼기 위해, 퇴근길에는 저녁 식사로 만들어 먹을 재료를 사기 위해 시장을 들른다. 재택근무 기간 중엔 점심식사 후 가벼운 산책 겸으로도 간다.
시장에서 유심히 보는 것은 주로 오이와 당근, 대파와 양파의 가격이다. 간단히 먹기 좋은 채소라 웬만하면 집에 구비해두려 하는데, 매일 조금씩 가격이 오르락내리락거리는 게 재밌다. 마트도 물론 가격이 오르내리긴 하지만 그 텀이 시장만큼 짧지는 않은 것 같다. 아, 요즘엔 산오징어 가격도 눈여겨 본다. 어제까지는 세 마리에 만이천원이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두 마리에 만이천원이었다. 오늘은 산오징어가 좀 더 비싸게 들어왔나보다.
오이 세 개만 가져갈게요, 했더니 골라서 가져오라고 한다. 필러로 얇고 길게 썰 예정이라 이왕이면 쭉 뻗은 오이로 세 개를 고른다. 천 원짜리 한 장을 내고 감사합니다, 하고 이번에는 옆가게를 기웃거린다. 흙이 묻은 당근을 기웃거리다 당근 두 개만 가져갈게요, 했더니 사장님이 오셔서 큰 걸로 드려야지, 하고 두 개를 골라 까만 비닐봉지에 담아주신다. 역시 천 원을 내고 감사합니다, 인사하고 돌아선다.
한 단에 천원짜리 대파도, 한 팩에 천원짜리 순두부도 모두 비슷한 과정을 거쳐 내 장바구니에 들어온다. 원래 시장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 동네 시장이 유독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들른 가게의 사장님들이 모두 친절하셨다. 한 할머니 사장님은 내가 온 걸 미처 못 보고 있다가 계산할 때야 보셨다고 미안해하며 웃으셨다. 그럴 때마다 고작 천원짜리 한두 장을 내면서 이렇게 친절하고 상냥한 인사들을 받아도 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사온 재료는 대부분 샌드위치의 재료나 간단한 요리에 쓰인다. 요리 실력이 그리 좋지도 않고, 요리하는 것을 딱히 즐기지도 않는 나지만 그래도 요즘에 들어서는 내 손으로 음식을 만든다는 게 기분을 좋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 것보다 천만 배 정도 더 기분 좋은 일.
일단 요리를 하는 동안에는 거기에 온전히 집중해야 하므로 일종의 명상 효과가 있다. 중간중간 맛을 보는 행위는 나의 입맛에 음식을 맞춰가는 과정이므로 맛에 대한 내 주관과 방향성이 있어야 하고, 어떤 접시에 어떻게 담을지 고민하며 예쁘게 플레이팅하는 것도 나의 주관적 미감이랄 게 따라붙어야 하는 일이다. 게다가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으면 배달음식을 시켜 먹을 때보다 과식도 덜 하게 되는 경향이 있지만, 만약 과식하게 되더라도 죄책감이 거의 없다. 신기한 일이다.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 많아서 내내 지루해하다가 빵도 만들어보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집에 강력분과 이스트가 있는 김에 에어프라이어로 치아바타를 만들어본 적이 있는데, 이번엔 오븐이 생겼으니 좀 더 나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같은 밀가루와 같은 이스트를 썼기에 맛이 그리 차이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번에 나온 결과물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내친 김에 사워도우를 위한 르방도 만들어보고, 포카치아 반죽도 만들었다.
빵을 만들 때의 기쁨은 요리할 때의 기쁨보다 더 큰 것 같다. 이제 막 만들어진 몰캉말캉한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재밌는데, 발효과정을 거쳐 칠퍽찰랑이는 반죽을 늘어뜨리거나 찔러보거나 치대는 건 더 재밌고, 반죽이 부풀어 기포를 담고 퐁실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마저도 재밌다. 잘 만든 게 맞는지 모르겠어서 반죽을 오븐에 넣고 중간중간 내부를 빤히 들여다보는 것도 재밌고, 다 구워진 빵을 요리보고 조리보다 예쁜 각도로 촬영해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일도 재밌다.
사실 맛은 그냥 그렇다. 재료도 재료고, 이제 막 입문한 생초보니까 그럴 수밖에. 한두 덩어리의 빵을 만들기 위해 수 시간, 때로는 하루 이상이 걸린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당연히 사먹는 게 훨씬 싸고 맛있고 효율적이다. 그렇지만 정확히 그 포인트에서, 그러니까 빵을 만들기 위해 수 시간, 때로는 하루 이상이 걸린다는 점에서 제빵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하루종일 별 거 안 하고 뒹굴기만 해도 빵 하나를 만들기만 했으면 그것만으로도 효능감이 느껴지고, 무엇보다 빵을 만들기 전 준비 단계-유튜브를 찾아보고 재료를 준비하고 본격적으로 만들기 위해 세팅하는 단계-부터 최종 목적지인 완성 시점에 도달할 때까지, 내 빵이 다 구워졌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며 꼭 발효되는 빵 반죽처럼 기대감이 부푼다. 몽글몽글 퐁실퐁실. 내일(의 내 빵)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당근과 오이, 순두부, 밀가루와 물, 그런 것들을 가지고 하루에 두세 시간씩 조물락거리는 일이 재밌다. 꼭 소꿉놀이 같기도 하고. 시간과 에너지가 많을 때나 할 수 있는 일이라 다시 사무실 근무를 시작하면 이런 경험을 지속해나가기 쉽지 않겠지만, 삶의 재미와 기대감을 위해 이 즐거움을 잊지 말아야겠다.
사진은 내가 만든 올리브 치아바타. 올리브오일을 찍어 먹으려다 토마토와 오이, 루꼴라를 잘게 썰고 레몬즙, 후추를 뿌려 미니샐러드를 만들어 올려 먹었다. 여름의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