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트 베이시 1904.8.21 – 1984.4.26
만일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1930년대의 캔자스시티도 그 후보 중 하나다. 뉴욕이 재즈의 중심이기 이전, 재즈가 장르음악으로 꽃을 피운 곳이 바로 캔자스시티 클럽의 밤문화다. 금주법 시대가 한창일 때도 캔자스에서는 수많은 클럽들이 새벽까지 영업했고 실력 있는 밴드들은 모두 그 곳으로 모였다. 아마도 그 당시의 정치가와 폭력조직이 얽힌 상황 속에서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나 싶다.
캔자스시티는 카운트 베이시(Count Basie)를 길러 낸 토양이었고, 그의 빅밴드는 훗날 발아될 비밥의 시대를 잉태했다. 레스터 영이 그 밴드에 있었으며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 ‘캔자스시티’에서도 암시하듯 소년시절의 찰리 파커도 그곳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따금 그의 음반을 가게에서 틀 때면 나도 모르게 그 옛날 캔자스시티의 클럽들을 마음 속에 떠올리곤 했다. 때로 밤새도록 지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그의 리드미컬한 피아노 컴핑을 따라가는 순간만큼은 어느 재즈 클럽도 부럽지 않았다.
그의 음반은 어느 것을 들어도 만족스럽다. 빅밴드 1기에 해당하는 데카 시절도 좋고 1950년대로 넘어와 새로 단장한 밴드 또한 훌륭하다. 그는 일찌감치 뉴욕으로 무대를 옮겼지만 말년에 이르러서도 캔자스시티 사운드에 대한 애정을 계속 간직했다. 앨범 타이틀마다 ‘캔자스시티’ 뒤에 멤버 숫자를 뜻하는 5,6,7 등을 붙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만 봐도 그렇다. 1970년대에 파블로 레이블에서 낸 작품들은 오랫동안 격정의 시대를 보낸 후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노대가의 따뜻한 후일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