쳇 베이커 1929.12.23 – 1988.5.13
평생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지만 쳇 베이커(Chet Baker)의 드라마는 줄곧 느와르 영화처럼 어두웠고 엔딩 또한 비극적이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말년에 유럽에 거주하며 보낸 시간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평온의 시기였다. 그래서 1970년대 후반부터 유럽에서 발매된 앨범들은 더욱 각별하게 들린다.
이 시절 그의 목소리와 트럼펫에는 딱히 설명하기 힘들지만 어렴풋이 감지되는 정서가 일관되게 스며 있다. 그건 ‘후회’가 아닐까 싶다. 세월의 풍파를 겪은 그의 주름진 얼굴과 음색마저 창백해진 트럼펫 소리가 포개어지다 보니 그런 심상에 젖어 드는 것 같다. 후회든 회한이든 그 무엇이라도 나는 그늘진 분위기의 쳇 베이커가 더욱 좋다. 단출하게 구성된 트리오 편성은 그 같은 감정선을 섬세하게 드러내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뮤지션들은 여전히 많았다. 영국의 엘비스 코스텔로(Elvis Costello)는 그를 초대해 자신의 곡 <Shipbuilding>의 간주부분 솔로 연주를 맡겼다. 이후 그는 엘비스의 <Almost Blue>를 불러 자신의 음반에 수록한다. 미국의 재즈 레전드가 영국의 록 뮤지션과 어울리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흐뭇하다.
그가 사망하던 해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Let’s Get Lost’가 개봉했다. 1950년대 미국의 아이콘이었던 젊은 시절의 모습과 세월이 흘러 주름이 깊게 패인 노안이 화면 속에서 교차할 때면 나도 모르게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영화로 압축된 현실은 실제보다 더 가혹해 보였다.